풍수지리

정감록의 의한 호남땅 십승지

임대건 | 2012-03-14 16:4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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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승지와 정감록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개발의 손길이 더딘 땅이 있다. 이른바 '정감록(鄭鑑錄)' 에서 말하는 십승지지(十勝之地)를 그렇게 부른다. '난리를 피하기에 좋고 가난과 전염병이 미치지 않는 땅' 으로 회자(膾炙)되는 십승지는 '새로운 시대' 를 열망하는 민초들의 가슴에 '꿈에 그리는 고향' 으로 전승되어왔다.
먼저 십승지의 개념이 담긴 비결(秘訣)이란 뜻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자기만의 비밀스런 방법이나 해법을 말한다. 이미 세상에 공개되었다면 그것은 비결이 아니라 공유가 된다. 오늘날 '비결' 의 대명사로 등장하는 '정감록' 은 한가지 비결만을 담은 서책이 아니라 서로 다른 내용들을 집대성한 비결의 결집으로 볼 수 있다.
대표적인 비결로는 '감결' 을 비롯하여 <도선비결> <무학비결>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 <토정가장결> <정북창비결> <역대 왕도 본궁수> <삼한산림비기> <피장처> <송화비결> 등 필사본에 따라 60여 개의 비결로 분류된다. 이 예언서들은 한자(漢字)를 분리시키거나 결합하여 뜻을 완성하는 파자(破字), 측자(測字)등으로 되어 이해하기가 난해하고, 표현 또한 직설적이 아닌 우회적인 방법을 써, 해석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또한 책을 쓴 저자와 시기 등이 불분명한데, 그것은 당시에는 이러한 책들이 나라와 사회질서를 어지럽힌다 하여 소지나 배포를 금지한 금서(禁書)였기 때문이다.
또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라 일일이 손으로 베껴 쓴 필사본으로 전승되다보니, 쓰는 사람의 실수든 의도적이든 내용이 누락 삭제되거나 또는 첨가, 보충되면서 똑같은 책이라도 내용과 해석의 차가 크게 달라졌다.
또한 십승지는 공통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데, 모든 비결서에 나오는 십승지를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라 하고 전쟁, 흉년, 전염병이 들어 올 수 없는 터로 알려져 내려왔으며, 모든 십승지가 위치한 지역이 서울 이남과 지리산 위쪽으로 집중되었고, 또한 태백산, 소백산,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 등 거의 험한 백두대간에 등을 대어 외부와의 교류가 자유롭지 못한 곳을 택하고 있었다.
또 거의 모든 십승지는 큰 산릉이 하나 혹은 두 개가 인근에 접해 있고 삼면이 급사면으로 둘러 쌓여, 배와 수레의 접근이 불가능한 불합리한 취락지로 이루어져 있다. 또 외부와의 연결통로가 모두 한 곳으로 연결되고, 수구처(水口處) 등이 험한 계곡과 협곡을 이루어 이방인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산자락 등이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 쌓인 공간 안에 수량(水量)이 풍부한 평야(平野)가 있어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1년 농사지어 3년을 먹고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풍족한 입지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대개 십승지는 정치, 경제, 사회, 군사적인 가치가 없고, 전쟁이 일어나도 적들의 이동성이 거의 없는 지역으로 국한되었다.
결론적으로 십승지는 미래지향적이기보다는 다가올 재앙을 피하기에 좋은 장소로, 난세를 피해 몸을 숨기기에는 좋은 터가 될 망정 여러 대를 살면서 번창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입지조건을 이루고 있었다.
정감록은 정감(鄭鑑)이란 이인(異人)과 이심(李沁), 이연의 대화식으로 구성된 '감결' 인데, 결론은 조선조의 이씨왕조가 망하고 새로운 정씨왕조가 건국된다는 것과, 외적의 침입 등 환란이 발생하는 시기와 그때에 몸을 보전하기에 좋은 십승지 등을 열거해 놓은 것이다.
결국 정감록은 전통 유교를 벗어나 왕조의 멸망을 예언한 일종의 참위서로, 정감록과 연관 지어진 정여립(鄭汝立)의 난이 1573년(선조 6)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1000여명의 사상자를 낸 16세기까지로 소급된다. 그리고 그 내용은 병란설(兵亂說), 피란설(避亂說), 말세관(末世觀)을 내포하고 있다.
먼저 병란설은 전란에 대한 공포의식을 담아, 과거에 임진왜란(辰年)과 병자호란(子年)이 있었는데(申子辰 설), 미래의 갑자(甲子) 해(1864, 고종 1년)에 큰 전란이 있을 거라 예언하였지만 전란은 없었고,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의 죄목으로 참형(斬刑)을 당한 사건만 있었다.
다음 피란설은 곧 닥쳐올 병란을 예고하면서 보신을 위한 피난처로 십승지(十勝地)를 강조하였다. 끝으로 말세론은 정치기강이 문란해지고, 봉건적 수탈과 함께 민생의 도탄 등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아 사회개혁의 방향을 암시하였다.
그런데 정감록은 사회 모순의 해결사로 등장하는 일반 종교의 말세관 과는 다른 '정진인 출현설'(鄭眞人 出現說)을 제기하여 이씨왕조가 막을 내리고 정씨왕조가 탄생되며, 그 수도는 계룡산이 될 거라 주장한 것이 특이하다.
영조 5년(1729년) 4월 9일자 실록을 보면, 포장(捕將) 이삼(李森)이 아뢰기를 「호남(湖南), 영남(嶺南) 사이에 정팔룡(鄭八龍)이라고 일컫기도 하고, 혹은 정도령(鄭都令)이라고 일컫는 자가 있어 포교(捕校)를 보내 체포하니 손에 철추(鐵椎, 철퇴)를 들고, 스스로 배수일(裵守一)이라 하였는데, 위인이 매우 요악(妖惡)스러웠습니다」하고, 우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작년에 강원도 감사(江原道監司)가 이종성(李宗城)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정인홍(鄭仁弘)의 증손(曾孫)가운데 겹눈동자인 사람이 있는데, 영남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구 몰려들고 있다.’고 하므로, 잡아다 살펴본즉 겹눈동자가 아니었는데, 이는 바로 인심을 현혹시키고자 하는 계책이었습니다.”하자, 왕이 이르기를, "장살(杖殺)하는 것이 가하다."」란 내용처럼 정감록에 등장하는 '정도령' '정진인' 은 정여립 난 이후 조선왕들에게는 경계와 함께 골칫덩어리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2. 호남 땅 십승지

1) 부안(扶安) 변산(邊山)의 십승지
생거부안사거순창(生居扶安死居淳昌)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서해의 항구도시 부안은 바다가 풍성하고, 들판이 넓고, 거기다가 변산이라는 명산을 끼고 있어 삼대삼풍(三大三豊)의 고장으로 알려지고 있다. 첫째는 들판이 크고 넓어 농작물이 풍성하고, 둘째는 변산이 높고 깊어 산짐승과 산나물이 풍성하였고, 나아가 변산의 소나무는 궁궐 건축자재로 쓰일 정도로 유명하였으니 임산물 또한 풍성하였다.
세 번째는 곰소의 소금과 젖깔, 그리고 격포에서 펼쳐지는 커다란 바다는 밖으로 위도의 칠성 앞 바다와 고군산 열도로 연결되는 풍부한 어장과 더불어 끝없이 펼쳐진 새만금 갯벌은 풍성한 어산물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고있으니 비로소 부안 땅(扶安: 扶-도울부 安-편안할 안)이 된 것이다.
우리 나라 비결(秘訣)에 등장하는 십승지(十勝地)는 거의 모두가 백두대간 자락에 등을 대고 있지만, 이 백두대간에서 벗어난 곳이 두 곳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공주 유구요, 또 다른 하나가 변산 동쪽 호암(壺岩)이다. 공주 유구야 백두대간에서 산간으로 이어진 금북정맥상에 있다지만 변산만은 백두대간과는 동떨어진 서해 바닷가를 점하고 있다.
이곳 변산은 삼신산중의 하나인 봉래산(蓬萊山)으로도 불리는데, 고창의 방장산(方丈山)과 고부의 두승산(瀛洲山)을 합쳐 호남의 삼신산이라 하였다. 또한 경치 좋기로는 춘변산추내장(春邊山秋內藏)이라 하여 '봄꽃 경치는 변산이오 가을단풍은 내장산' 을 꼽을 정도로 아름답다. 이곳 변산을 일으킨 연맥(連脈)은 호남정맥에서 분지(分枝)된 영산기맥이 고창의 방장산에서 북쪽으로 길게 올라와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갑자기 멈춰선 산진처(山盡處)의 명당을 이룬다.
 
2) 지리산(智異山)과 운봉(雲峰)의 십승지
남원시 운봉읍을 일으킨 산세는 백두대간이 속리산까지 진행하여 한 맥을 서남쪽으로 분지하여 한남금북정맥을 만든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던 대간은 김천의 황악산→ 민주지산→무주의 십승지인 덕유산을 일으키고 계속 남하하다가 장수의 영취봉에서 서쪽으로 한 자락을 들이밀어 호남금북정맥을 일군다. 그리고 대간은 아래로 내려오다 영산(靈山)인 지리산을 솟구치고자 여원치에서 크게 과협한 다음, 마지막 힘을 모아 운봉의 십승지를 일군 준항리의 수정봉(805 m)을 솟구친다.
 
전라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삼도를 아우르는 지리산은 주변으로 구례와 남원, 경남의 함양, 하동 등 크고 작은 도시와 취락을 아우른다. 모두가 한 폭의 그림 같은 마을이고, 인심이 후덕하여 살기 좋은 터다. 그리고 '정감록' 은 지리산으로 오르는 중간지대에 있는 운봉(雲峰)을 십승지의 하나로 꼽은 것이다.
운봉은 예전부터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가 연달아 나오며, 가히 오랫동안 몸을 보전할 수 있는 곳" 이란 소문이 나면서 여러 지방의 민초들이 난세를 피하여 이곳으로 정착하였다. 운봉의 형세는 동으로는 팔랑치, 서쪽은 여원치라는 큰 재의 중간에 터를 대고있는데, 북쪽으로는 덕유산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막고 있고, 남에는 지리산이 자연성벽을 이루고 있다.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운봉을 들어가려면 각각 팔랑치와 여원치를 넘어야 하듯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적을 이 두 재에서 방어한다면 십승지의 별세계로 요원할 수 있다. 운봉은 해발 450m에 위치하여 남산의 두 배 높이쯤이 되어 '하늘의 요새' 라 할 수 있으며, 고려 말 남해안을 휩쓸던 왜구들도 이곳을 범하지 못하였고, 근세의 동학농민전쟁이나 해방 후 빨치산전투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동쪽의 인월에서 운봉을 통과하는 입구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황산과 덕두산이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고, 이곳을 지나면 자신의 눈을 의심하듯이 광대한 평야지대가 나타나면서 풍요로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신천지를 만나게 된다.
비결의 <감결>에서 아홉 번 째로 언급한 십승지는 운봉(雲峰) 두류산(頭流山)이라 하였고, 남사고의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에는 운봉 땅 두류산 아래 동점촌(銅店村) 백리 안은 오래오래 보전할 수 있는 땅이 있어 장차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들이 연달아 나온다고 하였다. 또한 <토정가장결>에도 운봉의 두류산은 지형이 기이하고 아름답기가 궁기(弓其)만은 못해도 편안하고 한가로이 몸을 보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택리지의 이중환은 이렇게 말했다.“지리산은 남해 가에 있는데, 백두산의 큰 줄기가 끝나는 곳이다. 그래서 일명 두류산이라고도 한다. 세상에서는 금강산을 봉래(蓬萊)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方丈)이라 하며 한라산을 영주(瀛洲)라 하는데 이른바 삼신산이다.”"또한 사람들은 지리산에 태을성신(太乙星神, 하늘 북쪽에 병란, 재화와 생사를 다스리는 신령한 별)이 산다고 믿고있다. 그밖에 여러 신선들이 그 산에 모인다고 생각한다." "지리산은 계곡이 깊고 크며 땅이 기름진 데다 골짜기의 바깥은 좁으나 일단 그 안에 들어가면 들판이 넓어지기 때문에 백성들이 숨어살면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고 하였으며, "산 속 깊은 데서도 농사가 잘 돼 승속(僧俗)이 섞여 사는데 별로 애쓰지 않아도 먹고살기에 문제가 없다" 고 하고, 이중환은 지리산 사람들은 흉년을 모르고 산다하여 아예 그 산을 부산(富山)이라 하였다.
이곳 운봉의 발복은 하원갑자(下元甲子)시대에 살고있는 요즈음이 적기이다. 그것은 북으로 흐르는 하천(광천)이 운을 받는 연유이다. 그래서 십승지는 제때에 들어가야 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3). 무주(茂州) 무풍(茂豊)의 십승지
무풍면(茂豊面)은 원래 신라(新羅)의 무산현(茂山縣)으로 신라 청주의 변방에 속하여 백제 적천현과의 국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후 660년(무열왕 7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661년(문무왕 원년)에 청주가 폐지되면서 감문군에 속했다가 757년(경덕왕 16년) 전국을 9개 주(州)로 나눌 때에 지금의 무풍(茂豊)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이후 행정구역의 변화로 수시로 개명되다가 1414년(태종14년)에 옛 지명인 무풍을 다시 얻게 된 것이다.
무풍은 나제(羅濟)의 변방에 위치하여 영토 분쟁 시마다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역사의 흐름에 따라 수많은 역경과 정책적인 변동이 심한 곳이다. 한편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 이란 말은 오지(奧地)의 대명사로 치부되면서 세상일에 어두운 사람을 "무주구천동" 이라 할 정도로 무주라는 지명은 속세와 동떨어진 것으로 인식됐었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를 크게 실감하게 되는 곳이 무주다.
지난 75년 덕유산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문을 열면서 무주 또한 이름난 휴양지로 탈바꿈되기 시작하였다. 또 97년 동계 유니버니시아드 대회가 열려 세계 만방에 그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정감록을 포함한 비결서는 무주군에서도 가장 오지인 구천동을 제치고 경상도와 경계를 이루는 무풍(茂豊)을 십승지로 꼽았다. 오늘날 이 시점에서 본다면 구천동의 빠른 변화를 당시부터 예감했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섬찍한 생각마저 든다.
무주읍에서 십승지 무풍면을 가려면 구천동으로 들어가는 중간쯤의 나제통문(羅濟通門)을 통과하게 된다. 나제통문은 이름 그대로 옛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점에 설치된 관문이란 뜻이다. 무주읍과 성주를 잇는 30번 국도가 개설될 때, 이 작은 터널도 함께 뚫렸는데, 자칫 이름이 모호하여 고대에 개설된 굴이 아닌가 할 정도로 착각도 되지만, 이곳 통문의 역사는 70여 년밖에 안 된다. 나제통문을 지나면 완만한 곡선을 잇는 10리 계곡이 이어지다가 그 끝에 광활한 대지가 나타나면서 삶의 터전이 펼쳐진다.
대덕산(大德山)을가운데두고남쪽에서 흘러오는 남대천과 동쪽에서 들어오는 무풍천이 합류되는 사이에 너른 들판이 나타난다. 그러나 한때 만 명에 육박했던 인구가 지금은 3천명이 채 안 된다고 하니, 이곳 역시 이농현상의 바람을 피하지 못한 셈이다. 들이 넓어 식량의 자급자족은 가능하여 지금은 주로 담배와 고랭지 채소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무주읍에서 십승지 무풍면을 가려면 구천동으로 들어가는 중간쯤의 나제통문(羅濟通門)을 통과하게 된다. 나제통문은 이름 그대로 옛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점에 설치된 관문이란 뜻이다. 무주읍과 성주를 잇는 30번 국도가 개설될 때, 이 작은 터널도 함께 뚫렸는데, 자칫 이름이 모호하여 고대에 개설된 굴이 아닌가 할 정도로 착각도 되지만, 이곳 통문의 역사는 70여 년밖에 안 된다. 나제통문을 지나면 완만한 곡선을 잇는 10리 계곡이 이어지다가 그 끝에 광활한 대지가 나타나면서 삶의 터전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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