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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2,382건
   
개화사상가 유길준(兪吉濬) 사주
Mr.대산 2017-10-06 (금) 09:20 조회 : 1972

유길준(兪吉濬)
 

양력 : 1856년 10월 23일 08시
음력 : 1856년  9월 25일 08시
 

시 일 월 년
戊 己 戊 丙
辰 卯 戌 辰
 

65 55 45 35 25 15 5
乙 甲 癸 壬 辛 庚 己
巳 辰 卯 寅 丑 子 亥
 

1914년, 59세 갑진대운 갑인년에 신장병으로 사망함.
 
 
 
 
 
 
유길준[兪吉濬]
 

1856. 10. 23 ~ 1914. 9. 30.
 

한말의 개화사상가. 근대 한국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으로 수많은 저작물을 발표하여 개화사상을 정립했고, 정치의 전면에 나서 전근대적인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의 개혁을 단행했다.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성무(聖武), 호는 구당(矩堂)·천민(天民).
 

유길준의 동생 유성준, 큰아들 유만겸, 둘째아들 유억겸에 대하여는 아래 글을 참조. (유길준에게는 일본인 소실 소생인 조겸兆兼과 경겸京兼이있었으나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초년]
 
 
 
할아버지는 청송부사를 지낸 치홍(致弘)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진수(鎭壽)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1866년(고종 3, 11세) 병인양요가 일어나 서양인들이 즉각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아 많은 서울 사람들이 피난을 하자, 그의 집안도 선영(先瑩)이 있는 경기도 광주군 덕풍리로 낙향했다. 이곳에서 피난살이를 한 지 3년째 되는
 

1869년(14세) 봄에 서울로 돌아와 외할아버지 이경직(李耕稙)에게 배웠다. 이경직은 도정(都正)의 벼슬밖에 하지 못했으나, 서울 북촌(北村)의 유명한 학자들과 접촉하고 있었으며, 살림도 넉넉하여 많은 서적을 간직하고 있어서 외할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면서 각종 고전에 접할 수 있었다.
 

1870년(15세)경부터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 들어가 배웠다. 당시 박규수(朴珪壽)는 실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사절(使節)의 대표로 중국에 갔다온 뒤로 새로운 사상, 즉 개화사상을 펴고 있던 경륜가(經綸家)로서, 자신의 집에 찾아오는 젊은이들을 지도하는 일에 몰두했다.
 

과거 준비를 하던 유길준은 〈해국도지 海國圖志〉를 읽은 뒤로는 과거를 포기하고 실학과 중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에 관한 책을 탐독하게 되었으며, 김윤식(金允植)·어윤중(魚允中)·박영효(朴泳孝)·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 등 뒤에 개화파로 활약했던 인물들과 사귀었다.
 

1877년(22세) 2월 박규수가 병으로 죽은 뒤 김옥균 등 일부는 당시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던 중인 출신 유홍기(劉鴻基) 밑에서 지도를 받아 급진개화파가 되었고, 그는 김윤식 등과 함께 시인(詩人) 강위(姜瑋)의 지도를 받으면서 온건개화파가 되었다.
 
 
 
[일본과 미국 유학]
 
 
 
 

1881년(26세) 5월 신사유람단을 파견했을 때, 유정수(柳正秀)·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어윤중의 수원(隨員)으로 따라갔다. 유정수와 함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경영하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입학했는데, 이때 그는 26세였으므로 정식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고 후쿠자와의 서생(書生), 즉 개인지도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후쿠자와는 일본 사회에서 문명개화론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특히 그가 저술한 〈서양사정 西洋事情〉·〈문명논지개략 文明論之槪略〉·〈학문의 권유 學問の勸め〉 같은 책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도 언젠가 이러한 책을 써서 한국 국민들을 계몽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후쿠자와는 많은 저작물을 발표함과 동시에 1882년 3월 1일부터 〈지지신보 時事新報〉라는 일간지를 창간했다. 후쿠자와의 원고 요청이 있자 그는 일본 사회에서 신문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내용을 그해 4월 21일 〈신문의 기력을 논함〉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했다.
 

1882년(27세) 7월 23일 서울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약 3개월 뒤인 10월 13일 박영효를 수신사(修信使)로 하는 사절단(使節團)은 3개월간 일본의 각 기관을 시찰하고 여야의 지도자들과 만났을 뿐만 아니라 각국 사절과도 폭넓게 접촉하여 의견을 교환했다. 이때 그는 사절의 통역을 맡아 활약했으며, 1년 동안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박영효 일행과 함께 귀국했다.
 

한동안 외아문주사를 지내고, 박영효의 부탁으로 한성부에 신문국(新聞局)을 설치하고 신문 발간을 도왔으나 여의치 않았다.
 

곧 한국 최초의 견미사절단(遣美使節團)인 보빙사(報聘使)(답례로 방문하는 사절단)의 수원이 되어 미국을 시찰하게 되었다. 일행과 함께 미국의 각 기관을 시찰한 뒤 정사(正使) 민영익(閔泳翊)의 허락으로 유학생으로 남게 되었다.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으로 가 E. S.모스에게 8개월간 개인지도를 받고, 그 부근에 있는 바이필드의 더머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4개월 뒤 갑신정변(28세, 1884년 10월)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1885년(30세) 6월까지 1년간 학교를 다닌 뒤 배를 타고 유럽 여행을 시작했다.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동남아시아·일본을 거쳐
 

1885년(30세) 12월 16일 인천에 도착했다. 그러나 체포되어 처음에는 포도대장 한규설(韓圭卨) 집에, 뒤에는 서울의 가회동 취운정(翠雲亭)으로 옮겨 7년간 연금생활을 했다. 그동안 〈서유견문 西遊見聞〉의 원고를 썼고, 1895년(40세)에 활자화되었다.
 

1892년(37세) 11월에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내부대신 임명과 일본 망명]
 
 
 
1894년(39세) 4월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 전라도 일대를 휩쓸자 청·일 양군이 출동했다. 6월 조선정부는 그를 외아문주사로 임명하여 일본군과 접촉하게 했으나, 일본군은 도리어 경복궁을 점령하여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신정권을 수립한 뒤 내정개혁을 담당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했다.
 

그는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외무대신 김윤식, 탁지부대신 어윤중과 함께 대원군을 받드는 보수파가 되었고, 12월 17일 김홍집과 내무대신 박영효와의 연립내각이 성립되었을 때에도 같은 태도를 취했다. 신(新)관제로 박영효는 내부대신, 그는 내부협판으로 임명되었으나,
 

1895년(40세) 7월 반역음모사건으로 박영효가 해외로 망명하고 10월 8일 민비학살사건(을미사변)이 일어난 뒤 내부대신에 임명되었다. 단발령 공포로 춘천·원주 지방에서 의병이 봉기함에 따라 서울을 지키는 군대가 대부분 지방에 내려가고,
 

1896년(41세) 2월 11일 아관파천으로 내각이 무너지자 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0년(45세)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들과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를 작성하고 환국 공작을 펴다가 발각되어, 일본정부에 의해 일본의 남해 고도(孤島)에서 4년간 강제로 유배생활을 했다. 석방되어 도쿄[東京]로 돌아온 그는 개인적으로는 4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고독 속에 빠져 생각하는 바가 많았고, 국가적으로는
 

1905년(50세) 11월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됨에 따라 오래 전부터 동지들과 손을 잡고 국권을 확립하고 근대국가의 체제를 갖추어보려던 것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마음을 가다듬기 힘들어 기독교에 귀의했다.
 

또 이 시기에 본국으로부터 김정식(金貞植)이라는 사람이 도쿄 기독교청년회(YMCA)의 총무로 부임하여 유길준에게 기독교를 믿도록 설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식은 유길준의 동생 유성준(兪星濬)과 같이 서울의 종로감옥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그 역시 유길준처럼 기호(畿湖)사람이었기 때문에 정을 나누고 설득했던 것 같다.
 

그 뒤 도쿄에 있는 한국인들이 후지산[富士山] 밑에 있는 여관에 가서 사경회(査經會)를 개최하게 되자, 유길준도 같이 가서 〈사경회서 査經會序〉를 작성하여 기독교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피력했다.
 

일본 망명중에 있던 그는 헤이그 특사파견 사건으로 고종이 양위를 강요당하고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신지신문 新知新聞〉에 완강하게 반대한다는 기사를 발표했다. 일본이 모든 권한을 갖게 되니 비통하다고 하고, 자기는 귀국하면 교육사업에나 종사하겠다고 했다.
 

한편 그는 일본의 총리대신에게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여 일본이 정미7조약을 무효로 한다면 한국 국민들은 영원히 일본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년]
 
 
 
유길준이 정미7조약을 완강히 반대했다는 소식은 한국 국내에도 알려졌다. 그동안 그를 친일파로 생각했으나 그가 정미7조약을 반대했음을 듣고 가장 기뻐한 사람은 고종이었다.
 

1907년(52세) 8월 16일 일본에 망명했다 돌아온 사람들 중 유길준을 제외하고 모두들 일본측에서 주는 벼슬을 받았다.
 

고종은 우선 용용봉정(龍龍鳳亭:흔히 龍鳳亭이라 했으나 유길준은 조호정이라고 불렀음)을 유길준에게 하사했으며, 흥사단(興士團)을 만들어 교육사업을 벌이자 1만 원의 찬조금과 수진궁(壽進宮)을 사무실로 쓰도록 했다. 이 기관을 통해 유길준은 〈대한문전 大韓文典〉·〈노동야학독본 勞動夜學讀本〉 등의 책을 저술·간행했다.
 

그리고 교사양성기관인 사범학교를 설립·운영했으며, 소학교 교육을 정상화하려고 했다. 또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고자 한성부민회(漢城府民會)를 설치·운영했다. 유길준은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지지하고 있었고 영국을 가장 이상적인 나라로 보았다.
 

1910년(55세) 8월 29일 한일합병으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조선총독부가 세워졌다.
 

그동안 야(野)에서 쌓아 올린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감에 따라 그는 허탈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유길준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침묵을 지키고 사태의 추이를 살폈다. 한때 극비리에 노백린(盧伯麟) 등 몇몇 유지와 합동, 서울 시내의 중학생을 동원하여 합병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려 했으나, 일본 관헌에 발각되어 집에 연금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합병이 된 지 40일 가까이 되어 일본당국은 합병에 공로가 있는 한국인 78명에게 작(爵)을 내려 귀족으로 앉히면서 유길준을 회유해보려고 남작(男爵)을 주었으나 그는 완강하게 사절했다.
 

오랫동안 신장병으로 고생하다가 1914년(59세) 9월 30일 집에서 죽었다.
 

임종시 아들과 조카 등에게 〈신약성서〉를 읽게 했으며, 나라 잃은 설움에 죄책감을 느껴 유족들에게 자기는 아무런 공을 이룩한 것이 없으니 죽게 되면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설치했던 흥사단이 한일합병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으나, 1913년 5월 안창호가 무실역행(務實力行)을 내세우면서 부흥시켰다.
 

李光麟 글
 
 
 
저서에 <서유견문> <보로사국 후례대익 대왕 7년사> <구당시초> <세계대세편> <이탈리아 독립전사> 등이 있다.
 
 
 
 
 
 
 
 
 
 
 
 
 

유성준·유만겸·유억겸 - 유길준의 양면성 '극복'한 유씨 일가의 친일상
 

유길준의 친동생 -·兪星濬, 1860∼1935. 1916년 경기도 참여관. 1929년 중추원 참의
유길준의 큰아들 -·兪萬兼, 1889∼1944. 1940년 경학원 부제학. 1942년 중추원 참의
유길준의 작은아들-·兪億兼, 1896∼1947. 1939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구회 경성 3분회장
 

민족과 친일적 문명화 사이의 양줄타기----유길준(兪吉濬:1856∼1914)
 

한말·일제시대의 근대화 과정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기계(杞溪) 유씨들이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유길준이었다. 국한문 혼용체라는 문체로 서양의 문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개혁의 구상을 제시하였던 <서유견문,西遊見聞>을지었으며, 또한 갑오개혁의 가장 핵심적인 주체세력이었다.
 

그런데 이 유길준에 대한 평가는 개화파에 대한 평가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근대사를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민족사학자 홍이섭(洪以燮)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매우 흥미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유길준이 개화는 투철하게 했는데 한국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를 취한 것은 없지요.……개화도 좋지만 자기를 망치는 개화는 사실 곤란하지요. 그 <서유견문> 같은 데 나타난 정신을 보면 참 훌륭한데, 한국 사회로 볼 땐 좋은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중앙일보-인물로 본 한국사 좌담)"
 

유길준은 한국 사람의 입장, 곧 민족의 문제를 등한시한 서구식의 외세 의존적·친일적 개화(문명화)를 추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문명화의 목표가 '부국강병'이었던 만큼 언제나 민족 문제와 친일적인 문명화라는 서로 모순되는 양면성이 잠재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유길준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가지고 있었던 내면적·논리적 갈등의 내용이었다.
 

이 양면을 어떻게 결합 혹은 분리하느냐에 따라 민족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혹은 친일파가 되기도 하였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에 참여하였던 많은 개화파 인사들이 후에 친일파가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런구조에서 연유하는 것이었다. 유길준의 경우에는 그래도 문명화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민족 문제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른바 평행의 양줄에 한발씩 올려놓고 있었던 셈이었다.
 

유길준은 초기 개화파에 의해 일찍 일본과 미국에 유학하여 서구 문명의 우수성을 경험하면서 서구적인 문명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문명개화를 주장하였다.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를 통한 일본의 문명개화론과 서구식의 문명화론이 그에게는 혼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명화에 대한 소신은 그로 하여금 갑오개혁에서 실질적인 이론가이자 책임자가 되도록 하였다.
 

따라서 그는 외세의 힘에 의해 갑오개혁이 추진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즉, 근대화를 우선적으로 추구하면서 민족문제를 다음의 과제로 고려하였던 것인데, 이는 또한 그의 선배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추구하였던 자세와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유길준은 아관파천으로 갑오개혁이 중단된 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1907년8월 일제가 헤이그 밀사사건을 이유로 고종을 몰아내고 내정을 거의 독점하던 때에 귀국하였다.
 

그는 이후 "정치와는 일체 발을 끊고 사회 속에서 국민을 계몽하는 사업", 즉 교육운동과 식산흥업에만 종사하여, 1907년 11월 "지식을 계발하고 도덕을 수양"하여 사회를 진화시키고 국가 부강의 실익을 이루기위해 흥사단(興士團:안창호의 흥사단과는 다른 것임)을 만들고, 1908년 11월 인민의 자치를 위해 한성부민회를 만들었으며, 제국실업회와 국민경제회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과 활동은 일제의 통감정치라는 현실의 거대한 벽을 허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문제와 사회를 근대화·문명화시켜야 한다는 문제를 그의 입장에서는 동시에 달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양면의 갈등은 이미 그의 활동 과정에서 여지없이 나타났다.
 

그가 조직한 흥사단에는 김윤식*을 비롯하여 훗날 총독부 관료가 되는 김상연(金祥演:총무), 염중모(廉仲模), 한석진(韓錫鎭) 등의 일진회 회원 그리고 한성부윤 장헌식* 등의 친일파가 동참하고 있었으며, 뒤에 살펴보게 될 동생 유성준이 학무부장을 맡고 있었다.
 

또한 한성부민회 회장의 자격으로 그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장례식에 참여하였고, 이토의 추모회도 주최하였다. 유길준의 의도는 그러하지 않았는데 어찌할 수 없었다고 백보 양보하더라도, 이러한 점들이 이미 민족을 도외시한 '친일'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이용되었고, 그는 이런 구조에서 빠져 나올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바로 '조선귀족령'에 의해 부여된 남작 작위를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 자신과 함께 문명화를 추구하던 많은 동료들이 모두 작위를 받고, 중추원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마지막의 '균형잡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자신이 구상하고 추진하고자 했던 근대화·문명화를 이루는 것이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가령 1914년에 총독부의 지방제도 개정을 보고 종래의 지방제도가 불리하였지만 "조선총독의 시정이 급속하게 진행하여 지방 인민의 복리를 증진할 단서를 이루는 것이 금일에 지방행정상 근본적 정리로 그 단행함을 보게 된 것"이라하여({매일신보}, 1914. 1. 7), 총독의 새로운 정치를 지방인민의 권리가 증진되는 표시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가 민족문제와 문명화 사이에서서 동요하던 양면적인 모습은 그의 동생 유성준, 큰아들 유만겸, 둘째아들 유억겸에서도 불균등하고 또한 차별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유길준에게는 일본인 소실 소생인 조겸兆兼과 경겸京兼이있었으나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조선총독부 도지사와 중추원 참의를 지냈던 유성준(兪星濬, 1860∼1935)
 

유길준은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김옥균에게 아우 유성준의 일본 유학을 부탁하였다. 이 덕으로 유성준은 그해 10월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수학 중에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정변 직후 일본에 온 수신사 일행의 권유를 받고 1885년 1월에 귀국하였다.
 

유길준이 유폐되어 있는 동안에도 그는 정부의 근대화 사업에 참여하게 되였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내무부의 부주사 등을 역임하면서, 유성준은 선박수리, 세관 업무 등을 배우기 위해 세 번 일본을 다녀 오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에 재정 및 조세 사무의 1인자로 평가받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는 유길준이 주도하던 갑오개혁 때에는 농상공부 회계국장으로서 차관 도입 사무를 담당하는 등, 유길준의 개혁 논리에 기초하여 일을 추진하던 실무형 관료 역할을 하게 된다.
 

아관파천으로 갑오개혁이 중단되자 그도 역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다시 도쿄 메이지(明治) 법률학교에서 공부하였다(훗날 그는 1905년 한국최초의 {법학통론}을 저술하였다). 실무형이면서 일본통이라는 점에서 그는 다른 갑오개혁 관련자보다도 일찍 1902년에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해6월에 이른바 유길준의 '쿠데타 음모사건'(일본육사 출신의 청년장교들의일심회一心會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이때 유길준은 일본 정부에 의해 섬으로 유배되었다).
 

종로 감옥에서 유성준은 사상적으로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 감옥에는 이상재, 이원긍, 이준, 신흥우, 홍재기, 이승만 등이 있었다. 이승만과는 같은 감방을 쓴 '단짝'이었다.
 

이들은 감옥에서 기독교 서적을 읽었고,기독교를 신앙하게 되었다. 유성준은 1904년 2월 황해도 황주로 3년간 유배되었는데, 이 기간중에 황주교회에서 입교하였고, 1905년 5월 특전으로 석방된 후 서울에 돌아와 6월 연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철저한 일본식의 문명개화를 주장하던 일본통이면서, 이상재, 윤치호* 등과도 상통하던 기독교인이라는 점에서 그 이후의 또 다른 '양줄타기'가 진행되었다.
 

이 이후 그는 관료로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게 되는데, 통진군수, 내부경무 지방 치도국장, 내부 차관 등이 그가 맡았던 직책이었다. 그러면서도1907년 귀국하였던 유길준을 도와 운영난에 빠진 여러 학교를 통합하여 중앙학교로 발족시켜 자신이 초대 교장이 되었으며,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고, 또한 계몽운동에 참여하여 기호흥학회의 부회장과 이 학회에서 운영하는 기호학교의 교장을 지냈다(1909).
 

'합방' 이후에는 죽을 때까지 계속 충북 참여관(1910), 경기도 참여관(1916),중추원 참의(1921), 충청남도 지사(1926), 강원도 지사(1927), 중추원참의(1929) 등의 총독부 관료를 지냈다. 이러한 관직을 통해서 볼 때 그는 의심할 필요 없는 친일파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교육활동 및 기독교와 관련해서는 1920년 이래의 부르주아 민족운동에도 동참하였다. 조선물산장려회 초대 및 제2대 이사장이었고, 또한 민립대학 기성회 상무위원이었다. 또한 YMCA 농촌부 위원으로 1925년 3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결성에도 그의 조카 유억겸과 같이 참여하였다.
 

부르주아 민족운동에 유성준 같은 친일파들이 동참하고 있었던 것은 그 운동의 개량적인 성격이 엿보이는 것이었고, 또한 유성준이 친일적인 입장에 있으면서도 민족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양면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합방' 이후 양성된 친일관료의 대표격----유만겸(兪萬兼, 1889∼1944)
 

유만겸은 시종 총독부의 관료로 출세하였다. 배재학당, 흥화학교, 청년학원등에서 공부하였는데, 특히 영어공부에 열심이었다. 그후 일본에 유학하여 1917년 도쿄 제국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1920년부터 죽을 때까지 총독부의 관료로 지냈다. '합방' 이후 양성된 친일 한국인 고급 관료의대표격인 셈이다.
 

문경군수(1920), 경남 서무과장(1921), 경북 내무부사회과장(1924),  학무국 사무관(1926),  평남도 참여관(1928), 경북도 참여관(1930), 학무국 사회과장(1932), 평남도 참여관(1934), 충청북도지사(1939), 경학원 부제학(1940), 중추원 참의(1942) 등 그의 이력은 화려하기에 이를 데 없다.
 

그가 친일파로 기울어가는 모습은 이미 유학시절부터 나타났다. 일본의 대륙침략 이데올로기였던 아시아주의에 찬동하였고, 일본의 식민지배를 문명화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九年星霜], {學之光} 13). 특히 교육과 식산흥업을 강조하였는데, 이런 점은 그가 총독부의 지방관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가령 경북 산업부장 시절에는 면작장려,  사방공사 계획 등을 행하였고, 사회과장 때는 조선 의례를 중추원의 자문에 의해 실시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배 정책에 철저하게 순종하였던 그의 모습이 드러나는 대목인 것이다.
 

유만겸의 친일행각은 일제 말기에는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관료로서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1940년 10월에 '내선일체의 철저, 황국신민화, 신도의 실천, 지역봉공에 의한 고도 국방 국가체제의 확립'을 목표로 한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이 되었고, 또한 1941년 8월 흥아보국단준비위원회(윤치호, 고원훈*, 박흥식*, 김연수* 등 50여 명이 발기)에도 경기도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임전보국단의 평의원이 되었다.
 

특히 경학원 부제학의 자격으로 1941년 12월 17일에 '유림의 전승기원제(戰勝祈願祭)'를 거행하였다. 경학원 대제학이었던 박상준* 이회장, 고문 한상룡*, 상무이사 고원훈 등으로, 유만겸은 부회장이었다. 그들은 "우리 반도 2백만 유림은 대동단결, 대미·대영 선전포고에 관한칙소의 어성지(御聖旨)를 봉대(奉戴)하고 결사보국 모든 힘을 국가에 바치어 총후국민(銃後國民)의 책무를 완수하기를 기함"이라는 선서문을 결의하였다.
 

이때 유만겸이 창씨개명을 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942년도 경성일보사{조선인명록}에는 창씨하여 '兪 萬兼'으로 되어 있는데, 그 다음 연도판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유동준의 {유길준전}에는 창시를 거부하여 1940년에 관리에서 면직되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정확하지 않은 것 같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에서 친일파로----유억겸(兪億兼, 1896∼1947)
 

연희전문학교 부교장 겸 학감이었던 유억겸은 그의 형 유만겸과는 달리처음에는 부르주아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유길준에게서 분리되어 존재하였던 양면 가운데 한 면이었다. 1922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그는 곧 바로 연희전문 교수가 되었다. 그후 계속하여 그 학교의 부학감, 부교장이 되었으며, 해방 후에 교장이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주로 YMCA를 중심으로 많은 사회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이상재 등과 연관을 맺으면서 그는 1920년대의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내부 분화 이후 대체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같이 활동하였다. 1925년에 안재홍, 김준연, 최두선, 홍명희, 백남운 등과 조선사정연구회를 조직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1925년 흥업구락부의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흥업구락부는 미국에 조직되어 있던 이승만의 동지회와 일정한 연관을 맺으면서,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이갑성, 구자옥 등과 같이 대체로 기호지방의 기독교세력(주로는 감리교와 YMCA 의 활동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것이었다.
 

유억겸은 이 조직에 연희전문 교수 조정환, 이춘호, 최현배, 홍승국 등을 참여시킬 정도의 열성적이었다. 이들은 YMCA와 신흥우가 중심이 되어 농촌문제를 거론하였는데, 즉 정신의 소생, 생활의 조직, 농사개량 등을 통하여 농촌을 계몽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동아일보 중심의 자치운동에 반대하면서 민족연합전선의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26년 3월 안재홍, 유억겸은 조선공산당과의 연합전선 결성을 모색하는 한편, 연정회(硏政會) 부활계획을 저지하였다. 그리하여 이상재, 안재홍, 김준연, 유억겸 등의흥업구락부 참가자들은 신간회에 참여하였다.
 

이렇듯 민족주의적 활동에 열심이던 유억겸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이후부터 친일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해 2월 연희전문의 경제연구회 사건 조사중, 유억겸의 집에서 이승만의 동지회 관련 문서가 발견되면서, 이승만의 측근으로 있다가 당시 귀국한 윤치영이 검거되고 흥업구락부 조직이 발각되었다.
 

사실 이때에는 흥업구락부자체는 거의 활동이 중지된 상태였지만, 대륙침략이 본격화되고 일제의 통제가 심해지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일제 당국은 기독교에 대한 견제, 해외 독립운동 조직과의 연계 등을 우려하여 안창호 계열의 동우회(同友會)와 함께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윤치호, 신흥우, 안재홍, 최두선 등과 더불어 유억겸도 구속되었다.
 

이 사건 관련자 54명은 1938년 9월 사상전향서를 발표하고 기소 유예처분으로 석방되었다. "다수 유식인사를 사회적으로 매장해 버리지 말고 자발적 협력을 하게 하여 충량한 제국 인민으로서 갱생시키는 것이 일반의 정세로 보아 가장적절·타당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동우회원 41명도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 이후 두 단체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윤치호, 이광수*, 주요한*, 신흥우,정춘수* 등의 친일활동이 본격화되었으며, 유억겸도 이 대열에 서게 되었다.
 

이 때의 친일행위에 대해서 {친일파군상}에서는 '자진적으로 나서서 성심으로 활동한 자'와 '피동적으로 끌려서 활동하는 체한 자'로 나누고, 윤치호와 이광수가 전자라면 유억겸은 후자의 경우라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김성수와 마찬가지로 '경찰의 박해를 면하고 신병의 안전 또는 지위, 사업 등의 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 다닌 자'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이후의 친일활동에 유억겸의 이름은 빈번하게 등장하였다.
 

먼저 기독교 조직의 친일화에 참여하였다. 1938년 10월 14일조선 기독청년회를 만국기독청년회의 산하에서 이탈하게 하여 일본기독청년회에 가맹시켰던 것이다. 이를 추진하였던 사람들이 바로 앞의사건에서 '은전'으로 석방된 윤치호, 오긍선, 유억겸 등이었다.
 

그리고는 적극적인 친일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 7월에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1938년 7월 조직)의 경성분회 제3분회장(제1분회장 박영희*, 제2분회장 박득현, 제4분회장  장덕수*)이었고, 1941년 8월의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에는 그의 형 유만겸과 같이 참여하였다.
 

또한 같은 달에 임전대책협의회에도 참여하였다. 그들은 "최후의 승리는 우리 일본제국에 있으므로 반도의 동포는 국책에 순응하여 영광의 적자로 천황폐하에게 몸을 바쳐야 한다"고 외쳤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1941년9월 7일에 70여 명의 회원을 총동원하여 '채권가두유격대'에 나서"총후봉공(銃後奉公)은 채권(債券)으로부터"를 외쳤다. 유억겸은 이성근,박상준, 양주삼 등과 '광화문대'에 편성되어 활동하였다.
 

일제말기 친일단체를 망라하여 대표하였던 단체가 임전보국단이었다. 1941년12월 부민관에서 윤치호, 최린*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이 단체는, 조선민중을 바로 전쟁 후방에서 해야 될 근로보국, 물자의 공출, 의용 방위 등으로 몰아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유억겸은 이 단체의 이사였고, 유만겸은 평의원이었다. 그리고 그는 태평양전쟁이 확대되어 가면서 직접적인 전쟁고무 및 동원에도 참여하였다. 1943년 11월에는 학도병 종로익찬회에도 관여하였고, 또한 1945년 6월에는 언론보국회(회장 최린)의 명예회원이기도하였다. 연희전문의 부교장으로서 자신의 학생을 전장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특히 1942년 2월에는 {조광}(朝光)에 [전필승 공필취](戰必勝 攻必取:싸워서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여 반드시 탈취하라)라는 글을 통해 선전 대열에 참여하였다. 그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을 '대동아공영권 내의 10여억 민중의 공존공영을 위한 대동아 해방의 성전(聖戰)'이라고 규정하고, 후방의 국민이 평시와 같은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전필승 공필취'의 신념에 불타는 충용무쌍(忠勇無雙)한 육해공군 장병의 신고(辛苦) 덕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후방의 국민들은 성전을 관철하고 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보국(報國)할 것을 강조하였다.
 

 
 
 
 
 
출처 : 사주명리 - cafe.daum.net/sajusaj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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