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기록된 풍수지리의 속이는 재주
- 신라 초기부터 시작된 사술(詐術)적 풍수지리 -
朝鮮王朝가 망하기 14년전인 1896년 4월에, 약관30세의 젊은 청년 徐載弼(1866-1951)선생은 순한글판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는데, 그 당시의 논설을 살펴보면 風水地術家의 行術行爲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 시각으로 신랄하게 비판하였다.(1896.5.7 日字)
이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현재 유수의 일간신문사에서는 취미강좌라는 명목으로 風水地理說을 강의하고 있으며, 수년전에는 중앙의 핵심관서에서 개관한 바 있는 C관을 건축하기전에 地術家를 불러다가 相地할 정도로 官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의 심층심리를 지배하여오고 있다.
이처럼 시대의 古今을 막론하고 <풍수지리설>은 찬성과 비판이 뒤따랐고, 그 根據와 眞僞를 가려보려는 사람 또한 많으니 이에 대한 찬성론의 근거와 비판론의 근거를 가려 볼만한 일이다. 우선 <풍수지리설>의 근거를 살펴본다면 두가지 측면으로 분류하여 그 근거를 삼아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 첫째는 風水地理說이 발생한 배경적 분위기라고 할 수 있을것이니, 마음을 다하여 부모를 섬기는 孝誠的次元에서 吉地를 찾아 뫼셔야된다는 뜻으로써, 공자는 孝經의 끝부분에 조상의 墓穴은 가려서 써야된다는 뜻으로 <卜其宅兆>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卜은 길흉을 가린다는 뜻이고, 宅은 墓穴의 광중을, 兆는 분묘를 뜻하는 것이라고 후인들이 註하여 놓았으니 이러한 근거를 안다면 진실로 정성을 다하는 마음으로 부모와 祖上을 뫼심으로서 求福이 아닌 作福을 하여야지, 허황된 地術家의 말을 믿고서 吉地라하여 부모 조상의 遺體를 볼모로 發福을 꿈꾼다면 發福에 앞서 取凶의 길을 걷게될 것이니, 여기서 말하는 <卜其宅兆>는 오늘날에 있어서 地術家의 풍수설과는 그 근본이 다르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로 <풍수지리설>의 근거를 피력한 최초의 書冊은 郭璞(276-324AD)의 <葬書>로서 一名 <錦囊經>으로 알려져오고 있는데, <금낭경>이라는 이름은 郭璞이 쓴 <葬書>를 당시 東晋의 왕이 귀한 서책이라는 뜻에서 비단주머니에 넣어놓고 항상 곁에 두고 보았다는 古事에서 비롯되었는데 이책은 오늘날까지도 전해내려오고 있다.
<葬書>에 비로소 陰陽五行에 입각한 葬法이 서술됨으로써 풍수지리설이 널리 유포되었다할 것인데, 그후로 朱子도 <人子須知>라고 하는 풍수지리설을 피력한 책을 씀으로써 조선 500여년동안 朱子學을 존숭하여 온 우리나라로서는 유교사상과 더불어 뿌리깊게 심층심리에 파고 들었다 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佛家에서도 羅末麗初의 道先國師를 위시하여 麗末鮮初의 無學大師같은 禪僧들의 전설같은 行術이 장구한 세월을 거쳐오면서 저변확대와 함께 심층심리를 지배하여 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풍수지리설의 근거를 살펴볼때에 諸者思想의 한 독립된 분야가될 수 없는 술법으로서, 중국철학사에서는 郭璞이 도교적 仙化思想으로 일관하였다하여, 풍수지리설의 正宗이라는 <葬書>가 곽박에 의하여 쓰여졌으므로 그 원류를 도가쪽으로 분류하고 있으나, '老莊出於易'인 것이니 그 원초적인 원류는 易에 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선대 역사를 살펴보면 <풍수지리>로서 남의 살고있는 집을 빼앗는 치졸한 잡술로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곽박의 <葬書>가 쓰여지기 250여년전에 있었음을 찾아볼 수 있으니, 때때로 사기행각의 수단으로 쓰여오고 있음은 시대의 古今을 통하여 다반사의 일이 되어오고 있다.
三國史記의 新羅本紀條를 살펴보면 <脫解는 오로지 학문에 힘쓰고 겸하여 지리를 아는지라. 楊山밑에 있는 호公의 집을 바라보고 그 터가 吉地임을 알고 거짓꾀를 내어 이를 빼앗아 살았으니 후일에 月城이 그곳이다>고 하였고, 一然의 三國遺事脫解王條를 살펴보면 탈해왕이 소시적에 남의 집을 빼앗는 내용을 더욱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즉 <그 어린이(탈해)는 지팡이를 끌고 두종을 데리고서 토함산위로 올라가, 돌무덤을 만들고 7일동안을 머물면서 성안에 살만한 곳이 없는가 바라보니 봉우리가 마치 초생달같은데 오래살만한 곳 같았다.
내려와 그곳을 찾으니 곧 호公의 집이었다. 그는 속임수를 써서 비밀히 숫돌과 숯을 그 집곁에 묻어두고 이른아침에 그집 문앞에 가서 말하기를, [이곳은 곧 우리 조상때 살던집입니다]하니 호공은 아니라고 해서 다투어도 판결이 나지 않았다. 이에 관청에 말했더니 관청에서 말하기를 [무엇으로 네집이라는것을 아느냐?]하니, 어린이가 말하기를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 였는데 잠시 이웃 시골에가서 사는 동안에 남이 빼앗아 산것이오니 청컨대 땅을 파서 조사해 보시오]했다.
이에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옴으로 어린이가 빼앗아 살게되었다>. 이때 南解王은 脫解가 지혜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맏公主와 혼인 시켰고 얼마후에는 신라 제4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으니, 脫解王(재위기간: 57-79AD)은 풍수지리설을 응용해서 남의 집을 거짓으로 빼앗아 살면서 출세한 地術家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옛날의 중국에서는 <풍수지리설>이 없었다고 할 수 있는 근거로 墨子書의 節葬篇을 살펴보면, 堯.舜.禹 三大帝王의 장사지낸 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그 일부 내용을 인용하면, <우임금은 동쪽의 九夷를 교화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죽어 會稽山에 장사지냈었다.
이때 수의와 이불은 세벌이었고, 오동나무관은 세치였고, 칡으로 관을 얽어 맸으며, 염배는 고르지 못하였고, 墓穴도 깨끗이 파지않았으며, 묘혈의 깊이는 아래로는 지하수에 이르지 아니하고, 위로는 냄새가 새어나오지 않을 정도로 팠었다.
장사를 다 지낸 다음에는 나머지 흙만을 그 위에 모아놓아, 봉분은 세번 갈은 밭이랑 같은 정도에 지나지 않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墨子가 <節葬>이라는 題下에서 이러한 내용을 서술하는 목적은, 葬禮를 성대하게 치른다해 외침을 막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과 귀신으로부터 가호를 받거나 복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니, 장사에 쓰이는 물자와 비용을 절약하자는 뜻으로 이러한 글을 썼을 뿐이지, 풍수지리설을 비판한 것이 아닐뿐 아니라 그 당시에는 풍수지리설이 형성되기 이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풍수지리설>에 대한 비판은 조선 후기에 실학사상이 나타남으로써 실학파에 의하여 많은 비판이 뒤따랐으나, 그 비판되는 내용을 자세하게 분석하여 보면 <풍수지리설>그 자체를 비판한 것은 아니고, <풍수지리설>을 앞세워 허황되게 行術하거나 이에 동조하는 地術家 또는 地官들을 비판하였다고 보여진다. 일반대중 사이에서도 은근한 비판의 소리를 민간의 격언속에 속담으로 표현하였으니 <풍수손자똥이 약똥이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즉 남을 홀려먹는 풍수지술가는 孫子代까지도 못가서 代가 끊긴다는 표현이니 이들에게 당한 원망이 얼마나 컸으면 이렇게 표현하였을까 자못 흥미롭기에 앞서 심각한 피해자들의 절규라고 여겨진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현상이 속출하고 있다할 것이니, 남의 임야를 싸게사서 明堂자리가 있다하여 장본인은 巨富가되며 자손은 큰벼슬에 오를것이라고 속여서, 어리석은 제삼자에게 100배의 이익을 보고 되파는 일이 성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이 모셔진 남의 조상의 묘혈을 감정한답시고 명당이 아니니 천묘하여야 된다고 속여서 옮기도록 하면서 묘지의 <하이애나>짓을 하는 자칭 지술가들이 너무나 많은 현실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에 우리나라에서는 근본적으로 풍수설에 대한 비판을 한 사람은 世宗年間에 魚孝膽(1405-1475)을 들수있다. 그는 39세의 나이에 집현전에서 校理라는 正五品의 그리 높지않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단독으로 세종대왕에게 上疏를 올렸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풍수지리설에 대하여 근본적이고 전면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에서 비판을 가하여 세종대왕의 마음을 진노케하였음에 충분하였다.
세종실록 26年 12月條를 살펴보면 數千言에 달하는 그의 上疏文이 실려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로, 풍수지리설을 앞세워 宮城의 북쪽길을 막아서 백성을 못다니게 하는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닌것이니, 백성은 항상 품에 드는것이 아니고 仁德이 있는 왕에게 품기어지므로, 宮城의 북쪽길을 개방하여 백성들에게 仁德을 베풀어야 됩니다.
둘째로, 地理禍福說을 묘지에 적용하는 것도 오히려 옳지 않은것인데 이것을 미루어서 都邑의 땅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더욱 옳다고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셋째로, 夏.殷.周. 三代에는 풍수지리의 법이란것이 없었어도 역사의 장구함과 정치의 아름다움이 역사에 빛나서 후세의 나라들이 따르지를 못하니, 그 도읍한 땅이 어찌 다 지금 말하는 지리설에 합치되었던 것이겠습니까?
넷째로, 장안에 도읍한 나라로서 西漢이 햇수로 2백14년, 西魏, 後周와 隨高祖가 다 20여년씩이고 당나라가 290년이 되오며, 낙양에 도읍한 나라로서는 東漢이 햇수로 196년, 曺魏와 西晋은 4-50년씩이고, 隨陽帝는 겨우 13년이 되오며..., 이로써 논하건데 도읍한 땅은 같으면서도 국운의 장단이 같지 아니하오니 臣이 지금 <地理에 관계가 없읍니다>고 말씀드림은 이때문입니다.
끝으로, 術士의 地理禍福說과 같은 怪誕스러운 말을 취하지 마시고 천명으로 主脈을 삼고 民心으로 安對를 삼아서, 천명을 굳게하고 민심을 결합함으로써 국운이 반석같이 튼튼하여지고 태산같이 되면 이것이 억만년의 무궁한 福이 될것이오니 어찌 구구한 地理禍福의 邪說을 믿으려하십니까?
대략 이러한 내용의 상소문을 읽고난 세종대왕으로서는 진노하기에 충분하였으며, 국론을 분열시키는 자로 단정하고 귀양보내려는 마음에서 우선 魚孝瞻에 대한 뒷조사를 해보았다. 그의 고향에서 올라온 보고를 들어본 결과 수년전에 그의 부모가 사망한 후에 葬法에 따르지 않고 집뒤 대밭에 봉분만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세종대왕으로서는 언행이 일치한 신하를 두었다는 마음에서 그 후로 어효첨을 총애하였으며, 당시의 右參贊 鄭麟趾와 더불어 용비어천가를 짓도록 하는데 핵심적인 역활을하도록 하였다.
후일에 성종조에 이르러 判中樞府事의 벼슬까지 하였으며 그의 후손들은 三代에 四封君家에 이르도록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 四封君의 분묘가 있는 碧蹄邑 城石里에 찾아가 살펴볼적에, 그들의 先代인 어효첨은 지리화복설을 부정하고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葬法에따라 쓰여졌을 뿐만 아니라 400여년동안 잘 보존 되어오고 있으니, 한 집안의 先代와 後代사이에서도 풍수지리설에 대한 견해가 이토록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禍福感應論은 과연 徵驗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 참으로 궁금한 일이다. 아무래도 이러한 궁금증을 푸는데는 筆舌로서 다할 수 없는 일이겠으나 觀山의 경험을 토대로하여 두어가지 내용을 피력하여 본다면 墓穴에는 穴象이 뚜렷해야 하는데 이 穴象을 穴證이라고 한다면 이해하기에 편할 것이다.
묘혈의 혈증이란 來龍入首. 穴板. 蟬翼. 前唇의 다섯가지이다. 이 五大穴證이 뚜렷하고 뚜렷하지 못한데에서 화복감응론과 연결지워 진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결함이 없고 혈증이 뚜렷한 곳에서는 곽박의 <葬書>에 쓰여진 이론대로라면 <天氣가 下降하고 地氣가 上升해서 이 陰陽의 兩氣가 감응하여 行乎地中하면 五行의 氣로 化해서 葬者가 乘生氣하여 鬼福及人한다>는 것이 <葬書>에 쓰여진 地術의 要諦인듯 싶으나, 이러한 형이상학적이고 복잡스러운 이론을 떠나서 혈증과 대비하여 그 후손들의 증언을 들어보는 것이 궁금증을 풀어보는 가장 타당스러운 방법일 것이다. 한편으로 <葬書>의 이론을 입증하려한다면 지상과 지하를 막론하고 우주공간에 충만해 있는 하나의 原氣를 형이상학적인 대상으로 끌어올려서 설명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易의 이치가 象이나 數를 통하여 作卦됨으로서 吉凶悔吝이 판명되듯이, 음양지리풍수설의 화복감응론적 이치 또한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것으로서 葬者가 乘生氣하면 鬼神의 福이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우주물리학에서 氣는 우주의 질량이므로 만일 氣가 없어진다면 우주는 곧 파멸되는 이치와 같다고 표현하여도 무방할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明道(1032-1085)선생의 말처럼 <죽음과 삶, 그리고 사람과 귀신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生死人鬼 一而二 二而一>이라는 말에 관념론적으로 生과死, 그리고 人과鬼라고 하는것이 氣의 造化라는 뜻이 내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徐 花潭(1489-1546)선생도 그의 <鬼神生死論>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여 主論으로 삼았음에 상당한 뜻이 합치된다고 할 수 있으며, 횡거(1020-1077)선생이 쓴바있는 <正蒙>의 太和篇에 <太虛에는 氣가 없을 수 없으며 氣는 모여서 만물이 되지 않을 수 없고 만물은 흩어져서 太虛가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이렇게 순환하면서 이렇게 출입하는데 모두가 어쩔수 없이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다: 太虛不能無氣, 氣不能不聚而爲萬物, 萬物不能不散而爲太虛, 循是出入是皆不得已而然也>라는 글을 남긴 바 있는데 이 말을 代入하여 생각한다면 <葬者가 乘生氣하면 鬼福及人한다>는 뜻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鬼福及人>의 說을 믿을만한 것이라면 음양지리풍수설의 화복감응론을 믿을만한 것이고, <鬼福及人>의 說을 믿을 수 없다면 음양지리풍수설을 비판하고 배척하여야 할 것이다. 비판하고 배척한다고 해도 너무나도 뿌리가 깊도록 심층심리를 지배하고 있는 풍수지리설이 쉽사리 이땅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찬성하고 환영한다고 해서 욕심을 앞세워 '求山이 곧 發福'이라는 허황된 지술가의 말만 쫓다보면 殃禍를 自招하고 말 것이다.
大局的인 차원에서 풍수설에서 뜻하는 화복감응론이란, 개개인의 사리사욕만이 표준치가 될수있고 亂世에도 혼자서만이 살아남아 잘 되고자하는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만이 팽배한다면 총화적인 공익적 가치관은 뒷전으로 밀리고 말것인 즉, 우선적으로 사람의 도리를 다한다는 마음과 함께 至誠으로 부모와 조상에게 孝誠을 다하는것이 선결문제일 것이다.
아무리 좋다고 하여도 풍수설에 근거를 둔 葬法이 씨족공동체사회만을 위한 폐습이라면, 핵가족시대의 다원화사회를 위한 새로운 葬法을 따라감으로써, 개체적인 利欲만을 찾는 폐습을 버린다는 차원에서 점진적으로 벗어나려고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명나라 말기의 經學家이면서 道學者였던 사상가 李卓吾(1527-1602, 본명은 贄)는, 봉건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려고 <홍길동전>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許筠(1569-1618)과는 나라는 달라도 같은 시대에 살다간 인물인데, 그의 저작인 <李氏焚書>에서 변절된 벼슬아치와 잡술로써 팔자를 고쳐보려는 사람들에게 <모두가 도덕은 입에 담고 있으나 마음은 高官을 바라고 뜻은 巨富에 있으니 그 행동은 개나 돼지와 같다>고 하였으니, 무덤속에 들어있는 조상의 遺體를 볼모로 하여 잘되어 보고자하는 심층심리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벼슬아치들과 잡술가들에게 거침없이 욕설을 퍼붓고 잡술에 가득찬 當世의 학문이 萬世의 至論이 될 수 없다하여 태워서 없애버려야 한다는 차원에서 <李氏焚書>6권을 撰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事理의 선악과 事物의 가치를 분별하는 안목과 식견이 높은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는 뜻과 함께 새로운 시각에서 역사상의 사건의 자취와 행적을 적어서 山中에 숨겨둔다는 뜻으로 <藏書>68권을 撰하였다.
李卓吾는 75세의 나이에 撰書가 말썽이 되어 筆禍로 몰리자 투옥되었고 잡란스러운 벼슬아치들에게 定罪를 당하는것 보다는 차라리 죽는편이 낫겠다고 판단하여 옥중에서 자결함으로써 이들에게 대항하였으니, 19세기 말엽에 서재필 선생은 <독립신문>의 논설에서 우리민족에게 배움과 지식이 부족함을 한탄하였으나, 100년이 채 안되는 오늘날의 우리는 배움과 지식은 많으나 정신적으로 外華內貧의 상태요, 종교는 많으나 물질적인 자랑이 먼저요, 정신적으로는 위축일로에 있으며 앞뒤를 가린다면 금전이 먼저요, 운리와 도덕은 뒷전으로 밀리는 지경이요, 術士들에 의하여 묘자리가 사고팔릴 경우에 <효도(?)하려면 살고있는 집한채 값 이상의 돈으로 부모 조상의 묘자리를 사야한다>는 윤리를 앞세운, 협박섞인 괴리를 앞세워 사회의 가치관을 도전시키려는 행위에 반해 세상을 좀먹는 모든 무리들에게 의분으로 항거하는 第二의 허균과 第三의 李卓吾가 이 땅에 출현함직도한 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풍수설을 앞세워 현세의 이익만을 쫓으려고 맹신하면 怪誕스러운 미신으로 흐르기 쉬우므로 孝誠的 次元에서 머물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