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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 명택 (전남 해남의 고산 윤선도 古宅 역사.인물)
좋은생각 2017-09-28 (목) 14:25 조회 : 2606

[한국의 명가 명택]전남 해남의 고산 윤선도 古宅 역사.인물
2005/05/22 12:57

http://blog.naver.com/joba34/140013167777

[한국의 명가 명택]전남 해남의 고산 윤선도 古宅





천문과 풍수 녹아든 녹색의 장원




1만평의 집터에 50만평에 달하는 장원(莊園)을 가진 윤선도 고택에서는 호방함과 소요유(逍遙遊)의 쾌감을 맛볼 수 있다. 더욱이 청룡 백호 주작 현무라는 ‘유교적 만다라’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고산 고택은 천문과 지리에 해박한 옛 사람들의 지혜도 엿볼 수 있다.




조용헌 원광대 사회교육원 교수 cyh062@wonkwang.ac.kr





진 (晉)나라 때 장한(張翰)이란 인물은 낙양에서 벼슬살이하다가 가을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고향인 오중(吳中)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간절하게 생각났다. 그는 “인생은 자기 뜻에 맞게 사는 것이 귀중하다”고 말하면서 당장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소슬한 가을 바람이 불 때면 나도 살며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누군가 그 돌아갈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녹색(綠色)의 장원(莊園)’이라고 대답하련다.


내가 생각하는 녹색의 장원은 전라남도 해남에 있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년) 고택이다. 윤선도 고택은 그야말로 녹색의 장원이라고 불릴 만한 격(格)을 갖춘 집이다.


그 격은 건물 그 자체가 아니라 고택이 자리잡고 있는 터에서 전해지는 호방감에서 나온다. 그동안 답사해본 남한의 100여군데 명택 중에서 가장 호방한 터에 자리잡은 집을 꼽아보라면 나는 단연 윤선도 고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집터 자체의 규모만 따지면 1만여평 되지만, 집터를 둘러싼 ‘전체의 터’는 어림잡아 50만평 정도 되지 않나 싶다. 여기서 말하는 전체의 터라는 것은 사신사(四神砂), 즉 청룡(靑龍, 동방) 백호(白虎, 서방) 주작(朱雀, 남방) 현무(玄武, 북방)가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면적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윤선도 고택은 사신사(四神砂) 내의 면적이 무려 50만평에 달하는 정원을 가진 장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호방함만을 놓고 볼 때 이 집은 호남을 대표하는 고택일 뿐만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호방한 고택은 입지 조건상 넓은 평야지대가 많은 호남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여겨진다.


이름난 고택이 많기로는 단연 영남이 앞선다. 그러나 영남은 호남에 비해 산들이 많고 들판이 좁아서 집터가 오밀조밀한 짜임새가 있는 데 비해 호방한 맛은 적다. 거꾸로 호남은 평야가 많아서 짜임새는 적지만 상대적으로 호쾌한 터에 자리잡은 집이 많다.


근세에 회자되었던 “경상도 부자는 3000석을 넘기 어렵지만, 전라도 부자는 1만석이 넘는다”는 말도 영·호남의 지리적 차이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윤선도 고택은 평야가 많은 전라도 지역에서 만석꾼 집의 특성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고택임이 틀림없다.





남도의 예술과 학문의 요람


예술은 식후사(食後事), 밥 먹고 난 뒤의 일이라고 한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어떻게 미를 추구하겠는가! 예술뿐만 아니라 학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해남 윤선도 고택에서 조선 후기 호남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배출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흔히 남도를 예향(藝鄕)이라고 하는데, 그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면 윤선도 고택과 만나게 된다. 윤선도 고택은 호남 예술정신의 요람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며, 그러한 예술정신의 표출 배경에는 50만평의 광활한 전망을 가진 녹색의 장원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문화 창달을 위해서는 장원의 존재가 중요하다.


중국정신을 대표하는 ‘여씨춘추(呂氏春秋)’ ‘회남자(淮南子)’, ‘직하도가(稷下道家)’ 같은 저술은 대규모의 학자 그룹이 모여 만든 일종의 집단 저술이라 볼 수 있는데, 많은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여불위(呂不韋, ?∼B.C. 235년), 유안(劉安, B.C. 179∼B.C. 122년)과 같은 패트런(patron, 후원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그 패트론들은 틀림없이 많은 학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널따란 장원을 소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중국의 맹상군도 3000식객을 거느렸다고 하는데, 그 저택은 어느 정도 규모였을까 궁금하다. 맹상군도 장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 많은 식객을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윤선도 고택 뒤로 조성된 9000평의 비자나무숲을 산책하면서 또 한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이 정도 장원이 있다면 한가롭게 유유자적할 수 있는 생활이 가능하므로, 굳이 서울에 올라가서 아등바등 벼슬살이에 집착할 필요성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사실 조선시대의 벼슬, 그건 상당히 골치아픈 직업이었다. 자칫하면 당쟁과 모략의 그물에 걸려 제명에 못살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소요유(逍遙遊)의 쾌감(快感)을 알아버린 사람은 결코 조직사회의 속박에 묶이지 않는다. 고향의 순채나물과 농어회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눈에 불을 켜고 벼슬에 집착하지 않을 것 같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윤선도 고택의 내력을 살펴보면 자못 그런 정서가 물씬 풍긴다.


강진 일대에 흩어져 살던 윤씨들이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蓮洞里)에 들어와 터를 잡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초반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 1476∼1543년)에 의해서다. 고기나 잡고 땔나무나 하면서 은둔하겠다는, 다분히 도가적인 취향의 호를 가졌던 윤효정. 그러나 후손들이 실제 고기나 잡고 땔나무나 하는 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이후로 윤선도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내리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면서 부와 명예를 갖춘 명문가로 화려하게 부상한다.


그러다가 고산 윤선도 대에 와서 은둔이 시작된다. 정치적으로 남인 계보에 속해 있던 고산은 당쟁의 와중에서 노론인 송시열에게 밀리면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해남으로 귀거래사한 것이다.


그러나 고산의 귀거래사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처럼 생활고에 시달려야 하는 가난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벼슬살이라고 하는 사회적 욕구를 보상해줄 수 있는, 자연적 욕구인 소요(逍遙)의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는 보길도에다 낙서재와 동천석실, 세연정을 지어놓고 신선놀음을 하였는가 하면, 해남 연동의 종택을 증축한다. 윤선도는 고향에 돌아와 ‘귀거래사’ 대신 국문학상 유명한 한글가사인 ‘어부사시사’를 남긴다.


‘취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려가려다/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떨어진 꽃잎이 흘러오니 선경이 가깝도다/ 찌거덩 찌거덩/ 인간의 붉은 티끌 얼마나 가렸느냐’(윤선도, 어부사시사 봄노래)


윤선도의 예술혼은 그의 증손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년)가 이어받는다. 윤두서야말로 실제 이 집에서 거주한 주인이다. 이 집에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애 대부분을 여기서 보냈으니까.





윤두서의 자화상


윤두서는 그의 자화상으로 유명하다. 극사실주의적인 수법으로, 하도 정밀하게 그려서 한국 최고의 초상화라고도 한다. 280년 전에 붓과 먹으로 그린 그림이 라이카로 찍은 사진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준다. 특히 자신의 눈과 수염을 그린 부분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렬한 느낌이 오도록 하는 그 무엇인가가 깃들어 있다.


관상학에서는 남자의 관상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로 눈을 본다. 눈에는 그 사람의 정기가 어려 있기 때문이다.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면 눈에서 정기가 품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눈을 부시게 하는 빛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그림이 살아 있다고 하는 경우가 바로 이를 두고 말하는 듯싶다. 40대 남자의 수염 한올한올을 일일이 그려놓은 모습도 그렇다. 그 한올한올에서 굽히지 않는 야성과 아울러 정제된 섬세함이 느껴진다.


윤두서의 미술적 자질은 그의 손자인 윤용(尹溶, 1708∼1740년)에게까지 이어진다. 윤선도에서 윤용에 이르기까지 거의 150년 가량 예맥(藝脈)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집의 사랑채에 걸린, ‘예업(藝業)’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나무 현판은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징표다.


이 집안은 남도의 예술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요람이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의 실학은 주로 사색당파 중 남인들에 의해서 발전되었는데, 해남윤씨 집안이 전라도 남인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납득이 간다.


먼저 윤두서와 밀접한 인간관계를 맺었던 인물이 옥동(玉洞) 이서(李, 1662∼1723년)다. 이서는 실학의 대가이자 ‘성호사설’을 쓴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년)의 차형(次兄)이다. 이서는 윤선도 고택에 걸려 있는 ‘녹우당(綠雨堂)’이라는 당호와 이 글자를 새긴 현판을 직접 만들어준 사람이다.


녹우당이라는 현판 글씨는 실학과 예술의 결합을 나타내는 작품이라고 평가받고 있는데, 집 뒤의 비자나무숲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당호는 참으로 운치있게 지어진 이름같다.


이 두 사람은 형제들끼리도 친해서 윤두서의 실형(實兄)으로 묘갈명을 썼던 윤흥서(尹興緖, 1662∼1733년), 이익과 이서의 장형인 이잠(李潛, 1659∼1706년) 등이 단짝이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윤두서의 부인인 전주이씨도 실학과 관련이 깊다. 부인은 바로 실학의 선구자이며 ‘지봉유설’의 저자인 이수광(李光, 1563∼1628년)의 증손녀다. 이 집안의 실학과의 관련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실학의 완성자라고 일컬어지는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윤두서의 외증손이라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정약용의 어머니는 윤두서의 다섯 번째 아들인 덕렬(德烈)의 따님이다.


다산이 체계적이면서도 조선조를 통틀어 가장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남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외갓집의 영향이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아마도 다산은 강진 유배생활 중에 외가인 녹우당에 비치되어 있던 수많은 장서들을 열람했을 가능성이 높다. 외갓집에 온축되어 있던 학문적 토양 위에서 조선 후기 사상계의 거인인 다산이 배출되었다고 한다면, 녹우당은 다산의 학문적 젖줄이었던 셈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윤선도 고택, 즉 녹우당은 조선 후기 호남을 대표하는 예술적 성취와 실학사상의 산실이었음을 부인키 어려울 듯하다. 평지돌출은 어렵다. 한시대를 이끌 수 있는 사상가가 배출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바탕이 있어야 한다. 그 바탕이 윤선도 고택, 즉 녹우당이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사신사(四神砂)가 완비된 집터


윤선도 고택이 동양적 의미의 녹색 장원이라 불릴 수 있는 입지적 특징은 서두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무엇보다도 사신사가 아주 훌륭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사신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녹우당이 지닌 특징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고 본다.


사실 서구의 건축이론을 가지고 녹우당을 왔다갔다해봐야 별로 건질 만한 것이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 이 집터를 잡은 사람의 머릿속에는 서구의 건축이론이 전무한 대신 사신사라고 하는 풍수적 원리가 깊이 박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언급은 서구이론에 의존해서 자신의 건축을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동양의 건축가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있다.


“자신의 커뮤니티에 대한 인지방식이 없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방식으로 자신의 커뮤니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인식하는 사회는 결국 다른 사람들의 사회를 위한 종속체와 기생체가 되고 만다”(‘중국 고전건축의 원리’)


전통 건축분야에선 자신의 커뮤니티에 대한 인지 방식이 바로 풍수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전통건축을 이해하려면 풍수를 알아야만 종속체와 기생체를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풍수적인 안목에서 볼 때 윤선도 고택 터는 먼저 뒷산인 현무에 해당하는 산부터가 아주 잘생겼다. 뒷산은 덕음산(德陰山)이라고 불린다. 집터에서 바라볼 때 대략 200m 높이의 산이라서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이다. 해남 대흥사가 자리잡고 있는 두륜산에서 내려온 맥이다.


왜 이름이 덕음산일까? 여기서 음(陰) 자는 그늘로 해석되기 때문에 덕음산은 ‘덕의 그늘’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팔십리’라고 했듯이, 윤선도 고택은 덕의 그늘에 쌓여 있는 집이 된다.


산 이름에 굳이 덕(德) 자를 집어넣은 이유도 풍수적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덕음산은 토체(土體)의 형상을 하고 있다. 산의 정상 부분이 한 일(一) 자처럼 평평한 산을 풍수에서는 토체라고 부른다. 흔히 두부를 잘라놓은 것 같다고 한다.


그런데 음양오행에서 토(土)는 덕을 상징한다. 수(水)의 느긋함과, 화(火)의 정열, 목(木)의 고집, 금(金)의 결단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토다. 토는 어느 한쪽에 치우지지 않으므로 균형감각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토를 덕이라고 표현한다. 무조건 후하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균형 감각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게 덕의 덕목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 급함과 느림, 미와 추, 이타(利他)와 이기(利己)의 중간에서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동양의 제왕학에서는 이러한 균형감각을 제왕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꼽았고 그 상징이 토다.


그래서 풍수가에서는 집 뒤의 현무에 해당하는 산인 내룡(來龍)이나, 또는 집 앞의 주작에 해당하는 안대(案帶)가 평평한 두부 모양의 토체 형상일 경우 이를 매우 귀하게 여겼다. 이른바 말하는 ‘일자문성(一字文星)’이 이것이다.


내가 보기에 덕음산은 완전한 토체의 모습은 아니지만 돌출된 바위나 울퉁불퉁한 기복이 없는 산이다. 전체적으로 단정함과 깔끔함이 돋보이는 산이다. 덕음산에서 풍겨오는 이미지는 중후하고 세련된 신사의 인품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먹을거리 풍부한 노적봉


현무 다음으로는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의 맥을 살펴보아야 한다. 좌청룡의 좌측이라는 방향은 집을 등지고 보았을 때의 왼쪽이다. 그러니까 집을 마주보는 방향에서는 우측에 해당한다. 우백호는 좌청룡과 반대 방향이다.


좌청룡·우백호의 실질적인 기능은 바람을 막는 역할에 있다. 그러니까 좌측과 우측에서 불어오는 바람인 라이트 훅과 레프트 훅을 막아주는 역할이 좌청룡, 우백호다. 만약 이게 시원찮으면 좌우에서 바람이 몰아쳐 마침내 레프트·라이트 훅을 맞게 된다. 그러므로 좌우의 바람을 막지 못하면 그 터는 오래 가지 못한다고 본다.


특히 종교적 수행을 위주로 하는 불교사찰이라면 몰라도 사람이 거주하는 일반 양택의 경우 좌우 방풍(防風)은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기능이다. 바람을 막아주지 못하면 기운이 흩어진다. 울타리가 없으면 폭풍의 언덕처럼 되고, 막아주면 온화하며 어린아이의 요람처럼 아늑하다.


더욱 좋은 경우는 청룡 백호가 겹겹이 막아주는 경우다. 한 겹보다는 두 겹이, 두 겹보다는 세 겹이 좋은 것은 당연하다. 청룡 백호가 여러 겹으로 둘러쌀수록 좋다. 이럴 때 두껍다고 표현한다. 윤선도 고택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면 덕음산에서 내려온 청룡 백호가 세 겹으로 집터를 둘러싼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두꺼운 형세의 터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여기서 백호에 관한 여담 하나를 소개하고 넘어가자. 전북 고부의 두승산(斗升山)에 올라가면 해발 500m 정상 부근에 유선사(遊仙寺)라는 고찰이 있는데, 이 절의 우백호 쪽에는 석고로 만든 3m 정도의 호랑이 상이 산을 내려오는 모습으로 조성돼 있다. 백호의 맥(脈)이 아주 약해서 인위적으로 호랑이 상을 만들어 보비(裨補)한 것이다. 이것은 방풍기능은 물론 주술적인 효과까지를 염두에 둔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쪽의 주작을 살펴보자. 주작에 해당하는 산은 보통 안산(案山)라고 부른다. 안산은 좌정하고 앉아 있을 때 정면에 마주 보이는 산이다. 안산의 기능을 비유하자면 마치 볼록렌즈와 같다. 볼록렌즈는 집터를 향해 빛을 반사해주는 작용을 한다. 반사한다는 것은 집을 향해 기(氣)를 쏘아 보내준다는 의미다. 1∼2년을 쏘아 보내준다면 그 효과가 미미할지 몰라도 수십년을 계속해서 쏘아 보내주면 그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인체의 바이오 리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안산은 너무 높아도 안 되고 너무 낮아도 안 된다. 적당한 높이가 좋다. 툇마루에 앉아 있을 때 눈높이 정도 되거나 그보다 약간 낮아도 좋다. 안산이 너무 높으면 위압감이 들고 답답한 느낌을 준다. 반대로 너무 낮으면 허한 감이 들어서 안정감이 적다. 뿐만 아니라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차단하는 기능이 약해진다. 녹우당의 안산 높이는 적당하다. 높지도 낮지도 않다. 더구나 그 생긴 모습도 나락을 쌓아놓은 노적봉처럼 생겨서 더욱 좋다. 노적봉은 먹을 것이 풍부한 것으로 본다.





유교적 만다라의 세계


윤선도 고택의 특징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라는 사신사가 이상적으로 구비되었다는 점에 있고,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유교적 만다라’라 할 수 있다.


만다라는 티베트불교에서 우주의 총체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그림을 말한다. 기하학적인 도형과 무늬를 사용하여 우주의 삼라만상을 표현하고 있는 게 만다라다. 만다라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내가 우주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우주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느낌은 완벽한 안정감을 준다. 완벽한 안정감이야말로 니르바나(열반)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만다라는 우주 중심에 있는 나를 불교식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인도나 티베트가 아닌 한자문화권의 세계에서는 어떤 식으로 표현했을까? 윤선도 고택을 조망하면서 유교적인 방식은 과연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유교적인 만다라가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아닐까 싶다.


이 사령(四靈)은 우주의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우주의 동쪽 끝에는 청룡이 있고, 서쪽 끝에는 백호가 있고,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가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사령(사신사)이 둘러싼 한가운데에 집터를 잡는다는 것은 우주의 중심에 자리를 잡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아마도 유교적 만다라는 바로 풍수적 만다라이고, 풍수적 만다라는 자기를 둘러싼 동서남북의 산들, 즉 사신사가 완벽하게 집터를 둘러싼 형국이 해당된다. 이 안에 들어가 있으면 우주의 자궁 속에 들어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 이만한 터 같으면 경주의 불국사가 들어와 있어도 될 만한 자리다. 그런데 개인 집터가 자리잡고 있다. 불교가 성하던 고려시대 같았다면 절이 들어섰을 자리지만, 유교의 조선조가 들어서면서 유가 선비의 집이 된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불교에서 유교로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사찰이 들어설 터에 집이 들어섰고, 출세간적인 가치지향에서 입세간적인 가치지향으로 전환된 것이다.


불교는 집을 떠나서 사찰에 들어가 무아를 깨닫고자 하는 시스템이지만, 유교는 집을 떠나지 않고 집안에서 수신제가(修身齊家)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불교의 중심이 사찰에 있다면, 유교의 중심은 집(家)이다. 삶과 문화의 단위가 집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유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집이라는 곳은 밥 먹고 잠이나 자는 거주공간만이 아니라 거경궁리(居敬窮理)라는 유교적 수양을 실천하는 성스러운 공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 데나 집터를 잡을 수 없다. 성스러운 장소에 잡아야 한다.


유교적 성스러움을 확보하기 위한 조건 중의 하나는 사신사라는 풍수적 장치가 조화를 이룬 곳이다. 불교를 극복하고 유교로 넘어온 조선시대 선비들은 양택(陽宅)을 이런 각도에서 생각하였고, 녹우당은 그러한 유교적 성스러움을 전형적으로 갖춘 집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늘에 기원 둔 풍수론


한편으로 풍수에서 말하는 사령(청룡 백호 주작 현무)은 그 근원이 땅에 있는 게 아니라 하늘에 있다. 유교적 만다라의 근원도 하늘에 있다. 사령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늘을 연구해야 한다고들 한다. 그래서 ‘도의 근원은 하늘에서 나온다(道之大原 出於天)’라는 말이 하늘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절절하게 다가온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천(天)의 개념은 인격적인 상제나 하느님이 아니다. 천의 개념은 다름 아닌 천문(天文)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동양고전에 해박한 오초(吾超) 황안웅(黃安雄) 선생의 견해다. 그러므로 천문을 연구하지 않고는 지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고들 말한다.


동양의 고천문학(古天文學)에서 특별하게 생각하는 별자리는 황도대에 걸쳐 있는 이십팔수(二十八宿)와 북두칠성(北斗七星)이다. 하늘의 둥그런 원이 이십팔수이고, 이 이십팔수를 북두칠성이 마치 시계바늘처럼 돌아가며 가리킨다. 이십팔수가 손목시계의 둥그런 원이라면, 칠성은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바늘 역할을 한다. 손목시계는 12개(12시)의 눈금이 있지만 하늘의 시계에서는 28개(28시)의 눈금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지금 시간이 몇시인가를 알려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아야 하지만, 지금 우주시(宇宙時)는 몇시인가를 알려면 이십팔수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하늘의 가장자리 둘레인 이십팔수는 크게 동서남북 4개의 구획으로 나뉜다. 하늘의 동쪽에 28수 중 7개의 별이 배당되고, 나머지 서쪽·남쪽·북쪽에도 각기 7개가 배당된다.


먼저 동쪽에 있는 7개의 별 이름은 각(角) 항(亢) 저() 방(房) 심(心) 미(尾) 기(箕)이며, 별자리 전체 모습을 용의 모습에 비유해 청룡이라 한다. 이를 테면 각은 용의 뿔에 해당하고, 항은 용의 목, 저는 가슴, 방은 배, 심은 엉덩이, 미는 꼬리끝이라고 본다.


그런데 1세기경에 성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용에 대해 ‘춘분날 하늘로 올라가 추분이 되면 연못에 잠긴다(春分而登天 秋分而潛淵)’고 하고 있다. 정말 용이 존재해서 춘분날 하늘로 올라가는가? 이는 실제 용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별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확하게는 동방의 7별(각·항·저·방·심·미·기)인 청룡이 춘분날 하늘에 올라가서 추분날 내려오는 것이다.


“춘분날부터 매일 저녁 6시부터 1도씩 높이 솟아오르던 용은 약 3개월 만에 자신의 전모를 완전히 드러내게 된다. 하짓날 저녁 6시, 아직 여름 해가 서산마루로 떨어지지 않았을 뿐 점차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에 각항저방심미기의 용의 자태가 그 머리는 드높은 남쪽하늘 위에 두고 꼬리는 동쪽의 산등성이까지 서서히 그 장대한 모습을 번쩍이는 비늘과 함께 드러낸다. 그후 다시 3개월후 추분날 저녁 6시. 지는 해를 따라 서산 마루에는 용의 대가리가 마치 떨어지는 해를 잡아먹을 듯 부지런히 날아가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음양오행으로 가는 길’)


마찬가지로 서쪽의 별자리 이름은 규(奎) 루(蔞) 위(胃) 묘(昴) 필(畢) 자() 삼(參)인데, 그 모습을 호랑이에 비유해 백호라고 여긴다. 남쪽은 정(井) 귀(鬼) 유(柳) 성(星) 장(張) 익(翼) 진(軫)으로 공작의 모습에 비유해 주작이라고 한다. 북쪽은 두(斗) 우(牛) 여(女) 허(虛) 위(危) 실(室) 벽(壁)으로 거북의 모습에 비유해 현무라고 여긴다.


이 동서남북 가운데에는 하늘의 중심인 자미원(紫微垣)이 자리잡고 있다. 옛날 선비들은 28수를 주문처럼 외우고 다녔다. “각항저방심미기 두우여허위실벽 규루위묘…” 이렇게 외우면 복이 온다고 여길 만큼 많이 암송했다.


이처럼 풍수에서 중시하는 사신사는 하늘의 천문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하늘의 별자리에 있는 4마리의 동물이 땅에 내려온 것이 사신사인 것이다. 따라서 사신사의 풍수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땅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고, 천문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다.





천문을 관측한 윤선도


녹우당의 주인이었던 윤선도나 윤두서가 천문에 대해 전문가적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는 징후는 여러 곳에서 포착된다. 먼저 윤선도를 보자. 그는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귀향하면서 ‘남귀행기(南歸記行)’라는 시를 남긴 바 있다. 그 첫 단락이 이렇다.




‘만력 39년에/ 북두칠성의 두병(斗柄, 손잡이)이 자방(子方)을 가리키는 7일이라/ 거문고를 수선하고 약을 구입했으니 내 일은 마쳤구나/ 멀리 부모 계신 곳 그리며 해남으로 향하네(萬歷紀年三十九 斗柄揷子日有七 修琴賣藥吾事畢 遙念庭 向南國)’.





여기서 ‘두병삽자일유칠(斗柄揷子日有七)’이라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고산이 밤 하늘의 북두칠성 움직임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두병(斗柄)이란 북두칠성의 손잡이 부분을 가리키는데, 정확하게는 북두칠성의 7개 별 중 제6번째 별(武曲星)과 제7번째 별(破軍星)로 이어지는 부분을 말한다. 이 부분을 시침(時針)이라고 한다. 시계바늘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를 들면 입춘날 저녁 술시(戌時, 저녁 7~9시)에 북두칠성의 두병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면 정확히 패철상의 인방(寅方)을 가리킨다. 인방은 음력 1월이다. 북두칠성이 가리키기 때문에 정월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산이 밤하늘을 쳐다보는 바로 그 날에는 북두칠성의 시침(두병)이 자방(子方, 정북쪽)에 꽂혀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고산이 서울을 출발하던 그 날 시침이 정북쪽을 가리키는 날이었던 것이다. 이 표현은 고산이 서울을 떠나 해남으로 출발하는 날짜를 표시하기 위한 용도였다. 시(詩)에다 적어놓을 정도로 보아서 고산이 평소에도 천문의 흐름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우주시가 몇시인가를 알아야 인간세계에서 돌아가는 역사시(歷史時)를 알 수 있다는 관점이 동양 고천문학자(古天文學者)들의 세계관이다. 우주시와 역사시는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는 사고, 즉 천문현상과 인간의 삶이 서로 연관관계에 놓여 있다고 보는 천인상관적(天人相關的) 사상이 고천문학인 것이다.


윤선도뿐만 아니라 윤두서도 천문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듯싶다. 윤선도 고택에는 유물전시관이 별도로 마련돼 있는데, 고산과 공재가 보았던 많은 장서들이 눈을 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의 관심을 끄는 책은 34번으로 분류되어 있는 ‘관규집요(管窺集要)’ 25권이다. 유물 전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한 순간 나는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반가움이 겹쳤다.


나는 몇년 전부터 고천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 분야에 조예가 깊다는 여러 선생님들을 찾아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자문을 구하고 다녔다. 한국에서 천문에 관한 계보는 서경덕(徐敬德)-이토정(李土亭)-이서구(李書九)-이운규(李雲奎)-김일부(金一夫)로 이어져 내려왔는데, 근래에 오면서 그 맥이 희미해졌다. 제도권 대학에서는 고천문학이 거의 실전(失傳)되다시피하는 바람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재야에는 간혹 사람이 있었다. 그 분들에게 과연 어떤 책을 보아야만 고천문학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바로 ‘관규집요’라는 책을 보라고 했다.


이 책은 총 73권 분량으로 청나라 때 저술된 책이다. 28수와 북두칠성 그리고 오성(五星)의 운행에 관한 내용들이 들어 있는데, 동양 고천문학 서적 중에서 가장 포괄적이면서도 깊이가 있는 책이라고 한다. 사실 이 책 제목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재야에 계신 극소수의 천문 전문가만 아는 책인데, 바로 이 책이 윤선도 고택에 비치되어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관규집요’는 윤두서가 보던 책인데,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 책을 구입할 수 있었을까도 궁금하다.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비싼 책이었을 뿐만 아니라 구입하는 경로도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이 정도 수준의 천문서를 독파했던 윤두서의 학문 경계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풍수 전문가 윤선도


윤선도는 천문뿐만 아니라 지리에도 전문가였다. 재야에서 유통되는 국내 지리서들 가운데는 역대 우리나라의 풍수 고수(高手) 중 한 사람으로 고산이 빠짐없이 거론된다. 이걸 보면 윤선도가 풍수 전문가로서 전국적인 명성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 역대 풍수 명인들에 관한 자료를 정리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김두규 저)을 보면 윤선도가 효종의 왕릉 선정 작업에도 참여할 정도로 풍수의 대가였음을 알 수 있다. 훗날 정조는 윤선도의 풍수 실력을 무학대사와 같은 반열에 놓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경지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효종의 왕릉 선정 작업에 참여한 뒤 당시 임금인 현종에게 ‘산릉의’(1659년)라는 저술을 통해 당대의 명묘라고 일컬어지는 묘지들에 대하여 자신의 관점을 밝히고 있을 정도다.


이외에도 윤선도는 같은 시대에 살았던 명풍수가이자 친척이기도 한 이의신(李懿信)과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이의신은 해남의 연동 녹우당에서 고산과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의신이 밤중이면 몰래 말을 타고 집을 빠져나가 새벽녘이면 들어오곤 하자, 윤선도는 이의신이 명당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짐작하였다. 어느날 윤선도는 이의신에게 술을 먹여 일찍 잠들게 하였다. 잠이 든 것을 확인한 윤선도는 평소 이의신이 타고 다니던 말을 앞세웠다. 말은 주인 이의신이 밤중이면 언제나 가곤 하던 그 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가는 어느 지점에 멈추었다. 그 지점을 보니 명당임이 틀림없었다. 윤선도는 썩은 말뚝 하나를 찾아내 혈처에 묻고 집으로 돌아와서 시치미를 떼고 이의신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평소에 자리를 하나 봐둔 게 있으니 같이 가자고. 윤선도가 이의신을 안내한 곳은 바로 이의신 자신이 잡아놓은 자리였다. 이의신은 깜짝 놀라 “명당에는 임자가 따로 있다”는 말과 함께 그 자리를 윤선도에게 양보하였다고 한다. 해남지방에서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야기다(‘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녹우당의 좌향(坐向)은 갑좌(甲坐)다. 갑좌는 거의 서향에 가까운 방향이고 오행으로는 양목(陽木, 양 기운의 목)에 해당한다.





천문과 풍수의 조화


녹우당에 서서 주변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면 오른쪽 방향의 산봉우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주변 봉우리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봉우리인데, 바로 문필봉이다. 조지훈 종택에서 설명한 바 있지만 문필봉이야말로 조선조 유교사회에서 가장 비중을 차지한 봉우리다. 녹우당에도 빠지지 않고 문필봉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집이 앉은 좌향을 기준으로 놓고 볼 때 문필봉이 어느 방향에 있느냐에 따라 의미 부여가 달라진다. 패철을 놓고 재어보니 신방(辛方)이다. 신은 오행 중에서 음금(陰金, 음기운의 금)에 속한다. 집의 좌향인 양목과 비교해볼 때 금극목(金克木, 금이 목을 이긴다는 의미)이다. 집인 자기(甲)를 이겨 먹는 것(문필봉, 金)을 가리켜 사주학에서는 정관(正官)이라 한다. 따라서 문필봉은 집 좌향으로 놓고 볼 때 정관봉(正官峰)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정관은 무엇인가? 점잖은 벼슬을 상징한다. 학자가 배출되는데, 그 학자는 점잖은 벼슬을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녹우당에서는 옛날부터 이 문필봉을 중시했다. 왜정 때는 일본사람들이 인부들을 데리고 올라가 문필봉 정상부분을 삽으로 파내었다고 한다. 훼손하기 위해서였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오행의 상생상극(相生相剋)으로 집터와 주변 봉우리 방향과의 역학관계를 따지는 방법은 그 사람의 팔자를 보는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과 똑같은 방식이다. 산을 볼 때도 동일하게 사람을 보는 방식을 적용했다는 점에서 산인일치(山人一致)라고나 할까. 물론 풍수연구를 하는 학자 중에는 집의 좌향과 산의 특정 방향을 비교하는 것을 두고 ‘술법 풍수’라 하여 거부감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결론적으로 조선 후기 호남의 예술과 학문의 요람이었던 윤선도 고택의 풍수적 특징은 바로 사신사의 조화에 있고, 그 사신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문까지 파고 들어가야 하며, 그래야만 이 집터를 잡았던 당대 선비들의 안목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범상한 머리를 가지고 윤선도 고택에 숨어 있는 천문과 지리의 비밀에 접근하다 보니 나의 내공(內功)이 부족하다는 걸 여실히 느낀다.


이럴 때는 숲 속에 들어가 쉬어야 하리라. 녹우당의 뒷길 덕음산 쪽으로 30분 정도 숲 속 길을 올라가다 보면 500년 된 비자나무숲이 9000평이나 자리잡고 있다. 그 비자나무 숲에는 비자열매들이 여기저기 지천으로 널려 있다. 한 알을 주워 씨를 꺼내서 입 속에 넣어보니 쌉싸래한 향기가 레몬 향기 비슷하다. 비자향을 맡으면서 예향 남도를 생각한다.
 
출처 : 한국의 명가 명택 (전남 해남의 고산 윤선도 古宅 역사.인물) - cafe.daum.net/dur6f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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