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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신앙-풍수지리-
좋은생각 2017-09-28 (목) 14:27 조회 : 2313

들어가는 말

1.민간신앙의 개념
민간신앙은 민간층에 전승되는 자연적 신앙, 민간신앙이란 어휘는 아직 학문상으로 명확하게 규정된 학술어가 아니다. 따라서 그 개념은 막연하고 사람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민간신앙의 가장 큰 특징은 특정한 창교자가 없고, 계시적(啓示的)이 아니며, 신앙의 체계화가 이룩되지 않았고, 조직체가 형성되어 있지않고, 어느때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아득한 옛적부터 믿어온 민족의 계승적 신앙1)이다.

2.민간신앙의 종류
민간신앙은 가신신앙(家神信仰) 동신신앙(洞神信仰) 무속신앙(巫俗信仰) 독경신앙(讀經信仰) 자연신앙(自然信仰) 동물신앙(動物信仰) 영웅신앙(英雄信仰) 풍수신앙(風水信仰) 예조점복(豫兆占卜) 금기(禁忌) 주부(呪符) 민간의료(民間醫療)등으로 그 종류를 구분할 수 있다. 민간신앙의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고대로부터 자연종교를 저변으로 하고있는 것으로 애니 미즘 단계이다. 둘째는 애니 미즘으로부터 발전한 영혼 또는 사령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신앙시 되어 후에 가족제도가 확립되자 조상숭배로 발전한다. 셋째는 생산령(生産靈)신앙으로 농경이나 어업 등 생산생활과 밀착하여 산영(産靈)신앙이 생겨난다2)

이 용어 이외에도 민속신앙, 민속종교, 민중신앙, 민중종교라 일컬어진다. 종전에는 고유신앙, 토속종교, 향토신앙이라 일컬어지기도 했는데, 이에대해 학문적인 합의 사항이 없는 까닭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요즈음 민간신앙, 민속신앙 그리고 민속종교라는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민간신앙을 영어로 Folk religion 또는 Folk Belief라고 한다.3)

우리나라에서 민간신앙이란 용어가 최초로 쓰인 것은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1969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전국민속조사를 실시할 때 민간신앙이란 항목이 들어있는 것을 보면 그후로부터 이 용어가 보편화된 것같다.4)

한국의 민간신앙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세가지 흐름이 있다. 첫째가 민간신앙 형태로 전승되고 있는 무속신앙이고, 둘째가 점복 예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풍수지리가 있다. 우리는 이 가운데 풍수지리를 살펴본다.

가)풍수지리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천지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인생을 좌우하는 살아 숨쉬는 물상으로 보고있다. 땅에는 지맥(地脈)을 통해 생기(生氣)가 흐르고 있다고 보고 있는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이 생기를 어떻게 타게 되느냐에 따라 흥망이 좌우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생기를 타는 방법은 인간의 뿌리가 되는 조상의 뼈를 통해서 전달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나뭇가지에 비교할 수 있는 후손들이 번창하기 위해서는 생기가 왕성한 명당을 찾아서 조상의 묘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풍수지리신앙의 기본적인 이해다. 요컨대, 풍수설의 본질은 생기와 감응(感應)사상으로써 구성되어 있다. 풍수지리의 경전인 <청오경(靑烏經)>이나 <금낭경(金囊經)>에 의하면 ‘장(葬)은 생기를 타는 것이다.

나)풍수와 자손과 관계  
풍수에서 오행의 기(氣)는 땅 속에 흐르고 있다고 한다. 사람은 부모의 유체(遺體)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본체가 오행의 기를 얻은 즉 유체는 그 은덕을 입는다.’ 이것이 부모와 자손간의 감응 사상이다.

풍수에서는 부자(父子)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고, 부모의 행복과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부모의 해골과 자식간에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부모의 해골(本骨)이 생기를 받으면 그 유체(遺體)인 자손도 행운을 받는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부모의 본해가 땅 속의 생기에 닿으면 부모 자식 사이에 감응이 생겨 생기의 효과가 자손에게 주어지기 때문5) 이다. 요컨대 부모와 자식간의 감응의 원리를 따라 조상의 뼈를 통해 땅의 생기를 얻자는 것이 풍수지리설의 본질이라고 주장된다. 그러나 부모나 조상을 명당대지(明堂大地)에 모셔 발복한다거나 몹쓸 땅에 장사 지내어 재앙을 받는다는  과학적인 논리와 실증적인 근거는 없다.6)  또 부모의 유골을 좋은곳에 묻는다는 점에서는 아름다운 풍속내지 사상일지 모르지만, 그 유골로부터 덕을 입고자 하는 인간중심의 유골처리사상은 결코 아름답다고 하기 어렵다.7) 결국 풍수는 자손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결론뿐 아니라 인간의 자기중심적 이기심의 한 단면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는 조상의 묏자리를 잘 쓰려는 묘지 풍수가 성행했는데 병폐가 심했다고 한다. 좋은 곳이면 아무리 산이 높아도 가리지 않고 무덤을 썼다. 남의 땅이어서 사들일 수 없으면 몰래 무덤을 쓰기도 했다. 남의 무덤을 파내고 조상의 무덤을 강제로 쓰는 경우도 있었다.8) 이런 자손들의 수고와 상관없이 우리나라에서는 명풍수라고 이름났던 후손들이 발복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는 것만 보아도 이론과 실제가 맞지않는다는 산 증거가 된다.9)

음택풍수에서 찾고자 하는 명당의 조건인 방풍(防風)․방화(放火)․방수(防水)의 요소가 갖추어진 생토(生土)라 하더라도 결국 즉 풍수지리적으로 요건을 갖추지 않으면 명당이라 할 수 없다. 명당이 1개라면 흉당은 10,000개가 넘는다. 왜냐하면 그 넓은 산야에 명당이 있다고 치더라도 명당은 한 두곳이지만 나머지 땅은 명당이 아니므로 만 개도 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당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10)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풍수에 대한 맹목적 신앙에 대해 풍수의 본질적인 것은 과학이나 합리적인 것이 아니고 신앙이라는 것을 바로 인식하고, 대처하는 것이보다 중요하다. 즉, 민간신앙은 일방적으로 강압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를 해치는 것이 된다.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도 좋지않지만 종교를 행정적으로 억압하는 것은 더욱 나쁘다. 풍수가 종교적 신앙이라 하면 그것을 정책적으로 누르기 보다 종교적으로 처리 (종교적 승화,개종 다위)하는 방법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11)

1)풍수로 본 한양천도
일반적인 풍수지리 신앙은 생기가 충만한 명당을 찾아 묘지로 쓰려는 묘지풍수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양기(陽基)를 찾아 주택을 지으려는 거주풍수(居住風水) 사상도 있다.

  양기란 산사람의 주거지를 뜻하고, 이에 대해 묘지는 음택(陰宅)이라고 한다. 양기 역시 음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덕과 생기가 충만한 곳에 주택을 세움으로써 번영과 행복을 얻으려는 신앙에서 나온 명칭이다. 그런데 음택의 경우에는 한 가족의 번창을 위한 신앙에서 나온 신앙이었으나, 양기의 경우에는 한 나라 또는 마을이라는 집단의 번영을 위해 작용하는 사상으로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로부터 양기풍수는 국도풍수(國都風水) 사상으로 전개되었다. 곧 지덕이 풍성한 명당을 찾아 서울을 세움으로써 나라의  번영을 꾀하려고 했다. 고려의 서울을 송악(松岳)에 정한 것이나, 조선의 서울을 한양(漢陽)에 정한 배후에는 도참사상이 조선초기에도 크게 유행하였다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 건국초 태종은 一行, 도선, 무학 등의 풍수사상을 잇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정감록」류의 참위설을 금하고 불태워 버리는 조선판 분서갱유(焚書坑儒)12)를 이르킨다. 그 배후에는「정감록」은 조선이 멸망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출현한다는 역성혁명을 전제 하며 풍수도참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말세가 오면 새로운 세계에 새로운 구세주 미륵과 같은 존재가 출현한다는 사상은 이왕조에 대해서는 도전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풍수신앙에 「정감록」이니 「도선비결」이니 하는 민간신앙적 서물을 통해서, 또는 시천교, 동학교 등 종교활동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유행하였던 것은 결국 민중의 뜻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조선시대에는 지배자 왕족에 대한 민중의 반발을 촉발시킬 수 있는 신앙적 모체이었다. 그래서 비합리적이라고는 하여도 민중의 사상이 포함되어 있는 사상으로서 발전되어 왔던 것이다. 그것이 합리성이 결여되었으면서도 민중에게 유행했던 것은 민중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13)

고려 태조의 경우 훈요십조(訓要十條)14)에 나타난 풍수적 국시관(國是觀)이나 과거 시험에서 지리과 설치등은 풍수설이 고려조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가를 잘 알려주고 있다.

이후 조선왕조를 건국하고 서울로 도읍을 옮기는 문제와 관련하여 도참설이 풍미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되면서 ‘개성은 신하가 임금을 폐하는 망국의 터’라는 참설에 사로잡혀 천도계획을 세웠다. 처음 도읍 후보지로 거론된 곳은 계룡산이 아닌 한양이었다. 태조는 1392년 8월 13일 한양을 도읍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이틀 뒤에는 한양에 사람을 보내 궁궐을 수리토록 하였다.15) 그러나 태조는 처음부터 한양을 수도로 마음에 두고 있지않았다. 풍수지리등에 잘 통하는 정당문학(政堂文學)권중화(權仲和)16)가 충청남도 계룡산을 답사하여, 그 풍수의 양호함에 놀랐다.그러나 태조는 다른곳을 생각했다. 이에 권(權)은 국도로서의 도읍도(都邑圖)까지도 작성해서 바치니 태조도 계룡산 아래를 국도의 제일 후보지로 생각하며, 그 형세와 규모를 살펴보고자 1393년 정월 갑자기 공주 계룡산 행차를 단행하였다. 군신들을 거느리고 송도를 출발하여 양주 회암사(檜岩寺)에 들러 왕사(王師)무학을 동반하고 계룡산으로 향했다. 그곳에 5일간 머무르며 군신, 무학을 데리고 왕이 친히 높은 곳에 올라 형세를 관망하고 돌아오는 길에 두세명의 신하들을 머무르게 하여 신도(新都)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이 계획은 그해 12월 1일 갑자기 중지되었다.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하륜(河崙)의 반대상소에 의하면 “도읍은 모름지기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나 계룡산은 땅이 남쪽에 치우쳐 있고, 동서남북이 서로 떨어져 있다. 내가 일찍이 부친을 장사지낼 때 풍수의 여러 책을 조사해 본 바가 있다. 지금 듣기로 계룡의 땅은, 산은 건(乾)에서 오고,수는 손(巽)으로부터 흘러들어간다. 이것은 송나라 호순신이 말한 물의 장생(長生)을 부수는 쇠퇴하는 땅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도읍을 세우기에 적당하지 않다.”라고 했다. 요는 계룡산이 나라의 남쪽에 편재하여 나라의 중앙에 위치해야만 하는 국도(國都)의 본뜻에 어긋나고, 또 호순신의 <지리신법>이라 하는 새로운 중국풍수에 의하여 생각해 보아도 국도건설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왕은 군신과 하륜(河崙)과 함께 호순신의 지리법에 따라 전조(前朝)의 산릉도(山陵圖)를 검토해보고 신도축조를 중지시켰다.(<태조실록>22권), 그러나 천도하려는 태조의 뜻은 계룡산 신도 건설 중지에 그치지 않았다. 고려 시대 이래의 서운관(書雲觀) 소장의 풍수비록을 하륜에게 주면서 다시한번 신도(新都)의 땅을 선정하도록 했다.17) 수도이전을 둘러싸고 있는 권력간의 암투 속에도 왕이 친히 계룡산까지 현지 답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자신의 대선공약이라는 이유만으로 수도이전을 강제하는 모습과 일부 풍수사들은 풍수적 안목보다, 개인적인 정치성향에 따라 새로운 이론을 발표하는 21세기 풍수계와는 크게 대조를 이룬다. 1천만 인구가 살아갈 수 있는 주거공간으로써 수도이전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본다.

신라말의 풍수승 도선(道詵)의 <비기(秘記)> 중에 이땅을, “송도(松都)는 5백년, 이씨(李氏)가 기국(其國)을 탈(奪)하여 한양(漢陽)에 천도(遷都)하다. 한양은 4백년, 정씨(鄭氏)가 국권을 찬탈(簒奪)하여 계룡산에 축(築)하다. 신도(新都)는 산천이 풍부하고 조야(朝野)가 광(廣)하고, 인민(人民)을 치(治)함에 모두 순순하니 팔백년 도읍이다18)

무학대사나 권중화(權仲和)는 철원(鐵原), 신경(新京-현 서울), 신도천(新都川-신도안으로 계룡산 남록에 자리한 현재 국방부 역내)등 세곳을 답사(踏査)해 보고 신도안이 가장 좋은 대명당이라고 보았으나 그 당시 혁명주체 세력이였던 배극렴(裵克廉), 정도전(鄭道傳), 하륜(河崙) 등의 주장에 밀려 서울에다 정도(定都)하게 된것까지는 좋았으나 서울의 대궐터를 정할 때 무학대사와 권중화는 현 사직공원 자리에다. 유좌묘향(酉坐卯向)19)을 놓아야 할터라고 알려 주었으나 이에대해  정도전(鄭道傳)이 반박하기를 자고로 성왕(聖王)들은 남향터로 자리를 잡아 천하의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리고 남쪽의 밝은 형상을 보고 밝은 정치를 하라(聖人南面而聽天下嚮明而治)했거늘 대궐을 어떻게 동향을 놓느냐, 성인의 말씀대로 남향을 놓아야 한다고 우겨대무로서 할 수 없이 남향을 놓을수있는 현 경복궁(景福宮)터에 자리를 잡자고 했다. 무학대사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우수가 도좌하는 당국이니(右水倒左) 해좌사향(亥坐巳向)20)으로 좌를 정해야 한다 했으나 그러면 다시 중들의 세력이 중흥할 것이라고 하면서 끝까지 우겨 자좌오향(子坐午向)21)을 놓고만 것이다.22) 무학대사가 정도전,하륜 일당의 천단(擅斷)으로 대궐터와 방향을 잘못 정하는 상황을 보고 예언하기를, 큰 난리는 두 번(大亂二次) 작은 난리는 얼마나 당할지 모르겠고(小亂不知其數), 백성은 도탄(塗炭)에 빠질 것이며 10년을 평화롭게 살지 못하리라고 한탄23)했다. 일부 풍수가들은 북악산의 정기를 청와대 본관건물이 지맥을 끊는 형국으로 현 위치보다 약간 틀어줄 것을 권하고 있다.

각기 국도풍수신앙이 작용하고 있다. 한양을 처음 도읍할 때 무학은 주변의 삼각산․인왕산․북한산을 가리켜 군졸과 장군이 기치창검을 두른 듯 군왕을 옹위하고 있다고 표현하였다. 무학대사의 관산에 이렇게 보였다면 그곳은 전쟁터가 아니면 군부의 작전요새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곳은 현군(賢君)이 거(居)할 군왕터가 아니지 않는가. 어쨌든 이 한양터는 조선 오백년동안에 골육상쟁이 그치지 않았으며 수많은 외침과 6.25동란 등 전화가 그치지 않았으니 피라는 서울의 지형세로 보아 주산(主山)이 너무 험하다고 본다. 모름지기 군왕(君王)터는 산이 유순하고 아름다우며 물이 거칠게 흐르지 않고 옥소리와도 같이 유유히 흐르는 곳을 군왕지라 볼 수 있는데, 서울을 한 바퀴 돌아 행주쪽으로 나가는데 출수파구(出水破口)가 보이지 않으니 수법(水法)에는 알맞은 길지(吉地)임에 분명하다.24)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1천만 주민이 생존할 수 있는 풍부한 물이 있다는 것은 명당으로 손색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양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국토의 요충지로서 중요성이 충분히 인식된 위에, 고려시대에는 남경으로서 이미 준 서울의 자격을 지니고 있었던 곳이다.25)

  2)한국풍수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풍수참위설의 시작은 신라말 고려초 도선에게서 찾고 있다. 스님은 음양비보설(陰陽裨補說)에 의해 전국의 역처(逆處)를 찾아 비보사찰(裨補寺刹)26) 3,800곳을 세우게 했다. 또 풍수 지리적으로 결함이 있으면 탑을 세워 보완했는데, 이를 비보탑이라 한다. 대표적인 비보탑으로는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국보 48호)이 있다. 월정사는 일찍부터 풍수가들이 부처님의 법이 번창할 곳으로 지목하였다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오대산 월정사의 석탑이 불당 중앙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어서 처현 스님이 중앙으로 옮겨 놓았는데, 이때부터 절에 영험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지관이 보고는 ‘탑을 세울 곳이 아닌데 왜 동쪽으로 옮기지 않느냐’라고 탄식하여, 탑을 원래 자리로 옮겨 놓으니 다시 영험이 나타났다고 한다. 현재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을 중앙에서 동쪽으로 약 170cm정도 비껴서 있어 이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고려의 서울을 송악에 세운 것도 풍수참위설에 의한 것이었으며, 일단 국운이 기울고 세상이 불안해지면 지덕(地德)이 쇠했다 하여 또 천도를 선동히기도 했다. 인종(仁宗) 때의 묘청의 서경천도설(西京遷都說)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왕조가 망할 때의 불안한 시대에는 이러한 풍수도참설이 성행했다. 그리고 이것은 대체로 지배자층에서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세상의 여론을 조작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극도로 혼란했던 17세기 이후에는 민중의 신앙을 불러일으킨 새로운 풍수도참설이 유행하게 되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기독교계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흥종교들이 한국의 전통적인 민간신앙인 풍수도참신앙과 무속신앙의 내용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혹은 ‘해인(海印)’을 새 정부수립의 신기(神器)로하여 전설신앙끼지도 섭취하여 여러거지 신앙내용이 혼잡하게 섞여져 있다는 것이다.28) 현재 활동중인 풍수사들의 숫자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최근 동향으로는 단순히 풍수만을 전문적으로 하기보다 명리,관상 등 주변학문과 함께하는 추세다 결국 60-70년대 시골 마을에서 나경 하나에 의지한채 묘 자리를 잡아주던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들의 우리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있는 풍수사들의 수업과정은 먼저 풍수에 관한 서적을 몇 종 배우고, 이어 선배 풍수사에게 실제적인 지도를 받았다. 따라서 풍수사들은 누구에게서 전수룰 받았는가하는 법통이 대단히 중요했으니, 이점도 선승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음에 답산(踏山)이라하여 전국의 산천을 편력하며 이론과 실제와 부합 여부를 베교체득하고, 그러한 과정을 거친후에 비로소 한 사람의 풍수사로서 자격이 인정되는 식이다. 이 기간은 적어도 수업을 시작해서 10여년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29) 최근에는 일부 언론사 부설 문화센터, 대학내 사회교육원 등에서 대량배출되면서 교육의 질이 낮아지고 있다고 본다.

다)풍수의 전망
최근에는 생활속 인테리어에 도입되는 등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는 생활풍수로 응용되고 있으며 지맥 관념, 좀더 크게는 풍수관념은 단지 과거 한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우리관념속에 자리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지맥 관념에 ‘세뇌’되고 있다. 많은 초등학교 교가에는 ‘00산의 정기를 받은 터전위에 학교가 세워졌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서울,대전,경기,전북 등 4개 지역의 80여개 초등학교 교가를 수집분석한 결과 ‘00산’이 들어간 교가가 전체의 절반이 넘었다. 즉 초등학교 시절부터 ‘우리는 산의 정기를 받고 자란다’는 관념이 주입30) 되면서 풍수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생활속에 젖어들면서 오랜생명력을 가지고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3)민간신앙의 의미와 기능
민간신앙이 현대에도 민간층에 살아있는 기층종교로 자리잡고 있는데에는....첫째는 민간신앙이 고대로부터 민족적 종교의 기반을 가지고 민족공동체 속에서 생활을 통해 전승되어 오고있는 역사성을 들수 있다. 다음으로, 불교를 비롯한 유교,기독교 등의 외래종교가 삼국시대 이래 전래되었지만 그것은 민중의 의식구조와는 별개의, 대체로 소수 지식층의 종교로 머물었던 까닭도 그 요인으로 들수 있다.31)

전화(戰禍)와 관권(官權)의 밑에서 시달리며 비참한 생활을 통해 단련된 민중의 의식속에 역사종교(제도종교)가 강조하는 정신적 윤리성이나 내세적 구원의 미래 문제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당장 굶지 않고 살아야 하는 현실적 당면과제가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로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생활속에서 민간신앙에 의존하여 병을 고치고 행운을 얻어 재난을 면하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 민간신앙이 민중에게 부여하는 불안감을 해소하고, 생활에 희망을 주고,생의 이상과 의미를 부여하는 중대한 종교적 기능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32)

민간신앙은 민간층이 존재하는 한 살아있는 종교로서 정신적 불안의 해소, 생활적 희망의 부여, 역사의식과 심적유대의 강화등의 기능을 해왔다. 특히 민간신앙에서 민족의 신, 마을의 신, 가정의 신을 모시고 존경하여 집단의식을 가지는 것을 사회협동 체계의 유지에 크게 이바지한다.33)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1) 한국민속대백과사전(민중서관,1998)56쪽
2) 최인학,「민속종교와 종교」『민속과 종교』(민속원,2003),19쪽
3) 김명자,장장식, 「민간신앙」『한국민속학개론』(민속원, 1998),181쪽
4) 최인학,「민속종교와 종교」『민속과 종교』(민속원,2003),14쪽
5) 村山智順, 鄭鉉祐 역, 「한국의 풍수」(서울:명문당,1992),42쪽
6) 주광석, 「덕산비결」 (서울:한국지리문화사,1990), 31-32쪽
7) 최길성, 「한국민간신앙의 연구」(대구:계명대학교 출판부, 1994),225쪽
8) 이희근, 「우리 민속신앙 이야기」(서울:삼성당,2002),116쪽.
9) 장태상,「풍수총론」(서울:도서출판 전통문화사,2000), 7쪽 이경서 서문
10) 만성,「불꽃속의 명당」(서울;초롱출판사,2000)94쪽
11) 최길성, 「한국민간신앙의 연구」(대구:계명대학교 출판부, 1994),240쪽
12) '분서갱유'란 서적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땅에 묻어 죽인다는 뜻이다. BC 221년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는 법가(法家)인 이사(李斯)를 발탁하여, 종래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하는 등 철저하게 법가사상에 기반을 둔 각종 통일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같은 법가 일색의 정치에 대해 유가를 비롯한 다른 학파들은 이에 반대하고 공공연하게 자기 학파의 학설을 주장했다. 이에 시황제는 이사의 진언을 받아들여 진(秦)의 기록, 박사관(博士官)의 장서, 의약·복서(卜筮)·농업 서적 이외의 책은 모두 몰수하여 불태워버렸다. 또 이것을 위반하는 자, 유교경전을 읽고 의논하는 자, 정치를 비난하는 자 등은 모두 극형에 처한다고 정했다. 이것이 바로 '분서'사건이다. '갱유'는 방사(方士: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들의 신선사상에 열중한 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영약을 구하던 시황제가 그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분서를 시행한 다음해에 방사뿐만 아니라 학자들도 잡아들여, 금령(禁令)을 범하고 요언(妖言)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웅덩이를 파고 460여 명을 생매장시켜버린 사건이다.
13) 최길성, 「한국민간신앙의 연구」(대구:계명대학교 출판부, 1994),235쪽.
14) 고려 태조는 943년 대관 박술희를 불러 ‘훈요(訓要)’를 주면서 후대의 왕들이 마음에 잘 간직하도록 하라(中心臧之)고 했는데,10가지 조목 중 제2항,5항,8항이 풍수설에 바탕을 둔거이다.<고려사> 세가 제2태조 조 주요 내용을 보면 ① 국가의 대업이 제불(諸佛)의 호위와 지덕(地德)에 힘입었으니 불교를 잘 위할것 ,② 사사(寺社)의 쟁탈 ·남조(濫造)를 금할 것,③ 왕위계승은 적자적손(嫡者嫡孫)을 원칙으로 하되 장자가 불초(不肖)할 때에는 인망 있는 자가 대통을 이을 것,④ 거란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배격할 것,⑤ 서경(西京)을 중시할 것,⑥ 연등회(燃燈會) ·팔관회(八關會) 등의 중요한 행사를 소홀히 다루지 말 것,⑦ 왕이 된 자는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민심을 얻을 것,⑧ 차현(車峴) 이남 금강(錦江) 이외의 산형지세(山形地勢)는 배역(背逆)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⑨ 백관의 기록을 공평히 정해줄 것,⑩ 널리 경사(經史)를 보아 지금을 경계할 것 등이다. 이 가운데 8항의 지역차별적 귀절로 박술희의 조작설을 제기했다.(본인)  
15) 이희근, 「우리 민속신앙 이야기」(서울:삼성당,2002),120쪽.
16) 고려말에서 조선초의 학자(1322-1408),자는 용부(容夫), 호는 동고(東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지냈고 고사(故事) 의학,지리,복서(卜筮) 따위에 통달하였으며, 전서(篆書)를 잘썼다. 저서에<향약간이방>이 있다.
17) 村山智順, 鄭鉉祐 역, 「한국의 풍수」(서울:명문당,1992),21쪽.
18) 위 책, 717쪽
19) 묘자리나 집터 따위가 유방(酉方)을 등지고 묘방(卯方)을 바라보는 방향,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20) 묘자리나 집터 따위가 해방(亥方)을 등지고 사방(巳方)을 바라보는 방향, 또는 그렇게 앉은자리, 북북서를 등지고 남남동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21) 묘자리나 집터 따위가 자방(子方)을 등지고 오방(午方0을 바라보는 방향, 정북(正北)방향을 등지고 정남향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21) 장태상,「풍수총론」(서울:도서출판 전통문화사,2000), 454쪽
22) 위책 462쪽
23) 주광석, 덕산비결」 (서울:한국지리문화사,1990), 5쪽
24) 최창조,「풍수잡설」(서울:모멘트,2005),125쪽
25) 비보(裨補)란 지형상의 결함을 보충하고 부족한 것을 메꾸기 위한 인위적인 행위로, 고려시대에는 나라의 운을 일으키기 위해 명산대처(名山大處)에 사찰을 세우게 되는데 이것을 비보사찰이라고 한다. 이와는 달리 드센 지세를 인위적으로 눌러 방살(放殺) 위호(衛護)하는 것을 염승이라 한다. 일제시대에는 전국 주요명산에 혈맥을 끊는다는 이유로 철심, 목심등을 심었다고 주장하는 측과 단순히 측량용이란 주장이 지금까지 우리사회에 팽배하다.
26) 이희근, 「우리 민속신앙 이야기」(서울:삼성당,2002),106-107쪽.
28) 최창조,「풍수잡설」(서울:모멘트,2005),125쪽
29) 김두규, 「복을 부르는 풍수기행」(서울:동아일보사,2005),265쪽
30) 김명자.장장식, 「민간신앙」『한국민속개론』(민속원, 1998), 254-255쪽
31) 위책 255쪽.
32) 위책 254쪽.
 
출처 :한국민속종교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 민속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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