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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비결과 이지함의 묘 |
깡통박사
2017-09-30 (토) 08:31
조회 : 2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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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 이지함은 수리(數理)의 천재였다.
남은 일년 신수가 궁금하여 토정비결을 풀어 본다. 공식과 이치를 터득하고 나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자칫하면 남의 운세를 보아버리고 만다. 이처럼 치밀한 수학원리가 400여년 전 만들어졌다는 게 기이하기만 하다.
무작위로 1975년 3월15일(을묘년 음력 2월3일 경신일·32세)생의 운수를 풀어 본다. 토정비결은 반드시 음력을 기준으로 하므로 만세력이 있어야 볼 수 있다. 모두 144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상수, 중수, 하수를 산출해 내야 한다.
▲먼저 상수(上數)는 자신의 나이(32)와 보고자 하는 해의 간지(올해는 병술년)에 해당하는 태세수(20·매년 다름)를 합해 8로 나눈 나머지 숫자를 상수로 한다. 32+20=52. 52를 8로 나누고 남은 4가 상수다. 이때 나누어 떨어지면 상수는 8이다.
▲중수(中數)는 자신의 생월수(보고자 하는 해의 생일달이 크면 30, 작으면 29다. 병술년 음력 2월은 작은 달이므로 29)와 월건수(15)를 합해 6으로 나눈 나머지 숫자를 중수로 한다. 29+15=44. 44를 6으로 나누니 2가 남아 중수는 2다.
▲하수(下數)는 자신의 생일(15)과 일진수(17)를 더하여 이번에는 3으로 나눈다. 15+17=32. 32를 3으로 나누니 남는 수 2가 바로 하수다. 그러므로 1975년 3월15일생은 상(4)·중(2)·하(2)수를 조합한 422가 바로 신수다. 111부터 863까지 괘(卦)로 표시되어 있는 계수를 찾아 확인하면 풀이가 나온다.
여기서 태세수, 생월수, 월건수, 일진수 등과 복잡한 수리 공식 등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 권의 책 속에 계수하지 않고도 쉽게 찾아보는 해법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음력의 큰 달과 작은 달의 차이로 30일 생일의 경우, 어떤 해에는 사라질 수가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우주선이 날아가 달나라 흙을 퍼오는 세상에 토정비결이 과연 맞는가를 따지는 건 별 의미가 없다. 토정이 살던 그 어지러운 난세에 이 같은 비결서가 나왔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이 시대에도 종로거리나 압구정동의 사주카페에는 온갖 비결서의 예언을 찾아 사람이 찾아들고 있는 것이다.
토정과 관련된 옛날이야기는 누구나 한두 번쯤 들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가 충남 아산의 현감(지금의 군수에 해당)으로 있을 때 일이다. 아산만 물이 해일로 넘칠 것을 미리 안 토정이 백성들을 높은 산에 피신시켜 많은 생명을 구했다. 그는 또 걸인청을 만들어 일정한 정착지가 없는 걸인들을 거두어 구제하기도 했다.
삶의 궤적 자체가 기행과 이적으로 가득 차 전설 속의 인물로 알려진 이지함(李之函·1517∼1578). 평생을 마포 강변에서 흙담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호가 토정(土亭)이다. 전국 산하를 속절없이 누비며 천하 명당과 길지를 수없이 점지해 주고 다닌 기인. 과연 그의 묘는 어디에 있을까.
서해안고속도로 보령나들목을 나서니 대천해수욕장 이정표가 반긴다. 여름만 되면 더욱 설레는 고장이다. 더구나 이곳 성주면 성주사(聖住寺)는 통일신라시대 낭혜무염(朗慧無染·801∼888) 선사가 성주산문을 개창한 구산선문 중의 큰 가람이 아니던가. 지금은 폐사지로 남아 불자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지만 한국 불교사에 불후의 금자탑을 쌓아 올렸던 유서 깊은 절이었다.
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산 27-3. 보령화력발전소를 물어 찾아가면 오른쪽 국수봉 기슭에 바로 토정의 묘가 있다. 1992년 8월17일 문화재자료 제320호로 지정됐다. 그의 가계를 적은 현판 바로 위에 10여기의 묘가 얼굴을 맞대듯이 다정하게 용사(用事)되어 있다. 일행들 모두가 “그 유명한 토정 선생이 바로 여기 계셨구나” 하면서 감격스러워한다.
토정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토정의 가족묘 터는 1532년(중종 27년) 어머니상을 당할 때 처음 정해진다. 이때 2년 전 다른 곳에 모신 아버지 묘를 이곳에 합폄(합장)하면서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예언했다. “향후 우리 형제(지영, 지번, 지무)는 기해년(1539년) 귀득자(貴得子)하고 후손 중 일품직(一品職·영의정)이 나올 것이다”라고. 과연 그의 말대로 기해년에 형 지번이 후일 영의정이 되는 산해(1539∼1609)를 낳고 자신도 장남 산두를 낳았다. 모두가 크고 작은 벼슬을 하여 예언이 딱 맞아떨어졌다.
이런 자리로 수백년간 소문나 있으니 풍수 공부하는 후학들의 발길이 끊일 날 있겠는가. 잔디가 무성한 데로 먼저 간 발길 따라 오르니 묘 정상이다. 문득 조상을 명당 자리에 모셨거나 유명인물이어서, 오가는 길손들이 수없이 오르내린다면 자손들의 마음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여말 삼은 중 한 분이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6대손 토정의 가족묘를 보며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인구에 회자됨이야 토정이 앞서겠지만 비문을 자세히 살피니 그보다 높은 벼슬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혈처에 대한 윤갑원 교수의 설명은 어떠할까.
“여러 사람의 묘가 용사되어 있을 때는 전체 내룡맥(묘 뒤에서 잘록하거나 두툼하게 내려온 등성이)을 살피고 나서 당사자 묘를 보는 것이 순서입니다. 함께 올라가 봅시다.”
동행한 최병운 이병근 이교수 김경애씨 등이 앞선다. 입수룡(入首龍·먼 산에서 묘 뒤까지 척추처럼 솟아 내려오는 맥)의 방향을 재고,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자룡(子龍·북쪽)으로 내려와 결인(結咽·사람 목처럼 움푹 패고 좁아졌다가 힘 있게 경사지어 치고 올라가는 산세)이 된 후에 임룡(壬龍·북쪽에서 서쪽으로 15도 기운 방향)으로 바뀌면서 만두(巒頭)를 형성한 후 당판(묘를 쓰는 혈처)으로 내려왔습니다. 토정 선생 묘는 자좌오향(정남향)으로 흠잡을 곳이 없다고 판단됩니다.”
앞을 보니 기가 막히다. 쪽빛 같은 보령 앞바다가 간간이 출렁댄다. 주차장 길 건너의 옥대봉(玉帶峰·묘 앞에 좌청룡이나 우백호가 길게 이어져 띠를 이룬 산형. 관복의 허리띠라 하여 벼슬과 발복을 의미한다)이 바로 자기 안산(묘 앞의 가장 가까운 자그마한 산)이다. 더구나 바다 건너의 삼태봉(三太峰) 가운데 중심봉의 안산이 수려하여 큰 인물이 겹쳐 나올 자리란다. 마치 일월한문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듯하다. 경사는 겹친다 했다. 혈처 앞의 바닷물이 당문파(堂門波·묘 앞의 바다, 강이나 저수지 물로 부(富)를 상징한다)로 나무랄 데가 없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대개 안산이 혈처에 비해 너무 낮으면 역할이 미약하다. 청룡 백호와 안산이 너무 높아 푹 파인 분지에 묘가 있으면 남에게 능멸당하고 하극상을 당할 수 있다는 판단도 곁들인다. 이 같은 기록은 풍수의 고전인 ‘청오경’과 ‘금낭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토정 묘의 전후좌우를 살피다 보니 부모 형 아들 조카 등 촌수를 헤아리기가 어지럽다. 좀 더 자세히 챙겨 보니 아버지 묘 위에 아들이 있고 할아버지 묘 위에도 손자가 있다.
일반 사가에서는 증조할아버지 묘 뒤에 아버지 묘를 이장하면 크게 잘못된 것으로 아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자리가 넉넉하면 구태여 역장(逆葬)할 필요야 없겠지만 좁은 면적에 용사할 경우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용례는 조선왕조 초기에서 현재까지 묘지제도를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왕손 묘역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토정 가계의 촌수를 따지느라 전전긍긍하니 윤 교수가 간단히 풀어 준다.
“촌수 따질 사람과 하나로 만나는 조상을 찾으면 됩니다. 예를 들어 당숙간은 5촌인데 당숙과 나의 같은 할아버지를 소급해 올라 갑니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당숙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증조부는 나와 3촌이 되고 당숙에게는 2촌이 되어 3촌+2촌을 더하면 5촌이 됩니다.”
그러고 보니 초면의 문중 일가 간에도 계촌법(計寸法)이 분명해진다. 왜 사촌간인가 했더니 사촌도 할아버지와 2촌, 나도 할아버지와 2촌이어서 4촌간이다. 부자지간은 1촌이요 형제간은 2촌인데 부부간은 촌수가 없는 무촌이라고 한다.
토정은 대학자였던 화담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셨고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였던 백사 이항복을 제자로 두었다. 율곡 이이와 남명 조식은 그의 친구였다. 당대 성리학의 대가였던 조식은 마포 토담집의 토정을 찾아와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했고 후학들은 ‘한국의 장자(莊子)’로 일컫기도 한다.
첨단 과학문명 시대를 살면서 이인(異人)과 기인(奇人)을 어찌 봐야 하는가. 대선을 앞두고서는 예나 지금이나 복서( 卜書 )와 잡술(雜術)이 활개를 치고 있다. 비술(秘術)이라 하여 한마디 했다가 맞으면 도통한 양 으스대고 틀리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만다. 토정비결을 풀이한 책들도 수십권인 데다가 심지어는 자신만의 비법으로 해석했다는 기이한 책들까지 있다. 토정의 저서로 알려진 ‘월영도(月影圖)’와 ‘현무발서(玄武發書)’는 지금까지도 해독하는 이가 거의 없다.
토정은 백성들의 천거로 포천 현감과 아산 현감에 올랐으나 청빈무욕의 삶을 살았다. 그가 살던 시대는 벼슬 못해 안달하는 사람이 많았고 자리에 앉기만 하면 백성을 수탈하던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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