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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1,890건
   
철학자. 미셀 푸코 사주
Mr.대산 2017-10-03 (화) 10:51 조회 : 1300

미셀 푸코( Michel Foucault) - 철학자, 작가, 교수
 
 
양 력: 1926년 10월 15일 07:30 음/평: 1926년 9월 9일 07:30 남자
 
88 78 68 58 48 38 28 18 08.3
丁 丙 乙 甲 癸 壬 辛 庚 己 --- 甲 丁 戊 丙 : 59세 乾命
未 午 巳 辰 卯 寅 丑 子 亥 --- 辰 丑 戌 寅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 1926년 10월 15일 ~ 1984년 6월 26일)는 프랑스의 철학자이다. 그는 콜레즈 드 프랑스에 교수로 있을 때 '사상사'(The History of Systems of Thought)를 가르쳤는데, 이 과목의 이름은 그가 직접 붙인 것이다. 그의 글은 인문학, 사회과학의 많은 영역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푸코는 다양한 사회적 기구에 대한 비판, 특히 정신의학, 의학, 감옥의 체계에 대한 비판과 성의 역사에 대한 사상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또한 권력과 지식의 관계에 대한 이론들과 서양의 지식의 역사에 관한 '담론'을 다루는 그의 사상은 많은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현재의 비평가들은 그의 작업을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후기 구조주의의 관점에서 기술하는 데 반해, 1960년대에는 그를 구조주의와 연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초기의 푸코는 이런 설명에 불만이 없었으나, 나중에는 구조주의자들의 접근 방식과 자신의 방식과의 차이를 강조했다. 자신의 작업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설명이 붙는 것도 환영하지 않았으며, 자신은 어떻게 '근대성(modernity)'이 정의되는지에 관심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말년 푸코는 1984년 06월 25일 파리에서 AIDS 합병증으로 사망[1]하였다. 프랑스인 유명 인사로는 처음인 AIDS 사망자였다. 당시만 해도 AIDS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질병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그 후 논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르 몽드 지에 실린 사망 기사에는 감염을 시사하는 내용만 있을 뿐이었다.
 
88 78 68 58 48 38 28 18 08.3
丁 丙 乙 甲 癸 壬 辛 庚 己 --- 甲 丁 戊 丙 : 59세 乾命
未 午 巳 辰 卯 寅 丑 子 亥 --- 辰 丑 戌 寅
 
=> 본명은 土旺하여 洩侮克설모극하는 金水木이 희신인 명조이다. 丁火 일주의 특수성으로 인해서 다양한 조정이 필요한 명조이다.
 
=> 59세 甲辰대운 甲子年의 사망은 설명이 쉽지 않다. 辰戌沖으로 旺土가 동하고 子丑合이 子水를 묶는 변수로 작용하고 己巳月에 甲己合이 작용하여 병세가 심해진 것으로 추리하지만 그러나 이 정도의 설명만으로는 석연치 않다.
 
=> 철학, 종교, 사상에 연관된 土星이 많고, 용신이 인수성이므로 철학자에 교육자가 가능했다고 본다.
 
* 푸코의 어린 시절은 최고의 수재들이 모이는 '고등사범학교' 진학에 맞추어져 있었다. 1945년, 그는 입시를 위해 태어나고 자란 작은 도시 푸아티에를 떠나 파리로 갔다. 최고의 합격률을 자랑하는 앙리 04세 고등학교로 전학가기 위해서다. 이 '거칠고 이상하며 극도로 내성적인 젊은 촌뜨기'는 한 해를 '재수'한 끝에 1947년 마침내 고등사범학교에 합격하는 데 성공한다.
 
=> 庚子대운은 호운이다. 21세 丙戌年은 火土가 강해 흉년이다. 22세 丁亥年은 지지로 水木이 강해 호년이다.
 
* 고등사범학교는 사르트르, 퐁티 등 프랑스 최고 지성들이 거쳐 간 학교다. 이 곳 학생들 중에는 자부심과 젊은이 특유의 치기가 빚어낸 괴짜들이 많았다고 한다. 푸코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꼭 싸움닭 같았다. 하루 종일 고독하게 지내다가 친구들에게 '야유'를 보낼 때만 말을 했다고 한다. 남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는 점심, 저녁 식사 시간에는 누구든 공격하고 아무하고나 논쟁을 벌였다. 심지어 강의실에서 칼로 자살을 시도할 정도였는데 이 정도면 괴짜라기보다는 정신병자에 가까울 듯싶다. 실제로 그는 항상 '광기로 떨어질 수 있는 외줄 위에서 불안한 평형을 유지하는' 위태위태한 학생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사이코 같은 행동도 수재들에게는 천재다운 행동으로 정당화되는 법이다. 푸코도 그랬다. 그는 실제로 고등사범에서 가장 뛰어난 그룹에 속했고 끊임없이 읽고 또 읽으며 자료를 꼼꼼하게 정리하고 사색하는 성실한 공부로도 잘 알려진 학생이기도 했다.
 
=> 庚子대운은 호운이지만, 23~24세 戊子年과 己丑年은 土旺한 해로 흉년이다.
 
* 25세 庚子대운 辛卯年 : 1951년. 한 번의 실패 끝에 그는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한다. 시험을 위한 시범 강연으로 주어진 주제는 '인간의 성본능'이었다고 한다. 심리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이듬해에는 병리심리학에 대한 학위를 받았고 이를 위해 그는 병원과 감옥에서 심리검사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푸코의 학창시절을 보면 흥미롭게도 후의 그의 철학적 작업에 쓰일 주요 소재들이 모두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조금 뒤에 살펴보겠지만 광기, 성,(性) 병원과 감옥은 그가 철학적 분석에 사용했던 핵심 개념들이다.
 
=> 庚子대운도 호운이고 25세 庚寅年도 호운이지만 자격시험에 낙방한 것은 24세 己丑年이 흉년이었기 때문으로 본다. 그러나 庚寅年이 호년이니 공부가 잘돼 25세 辛卯年에 합격했다고 본다. 辛卯年은 寅卯辰 방국을 짜는 해이다.
 
* 30세 辛丑대운 乙未年 : 1955년. 푸코는 스웨덴 웁살라의 프랑스 문화원 원장 자리를 얻는다. 이 곳 대학의 강사 자리를 겸임하던 자리였는데 푸코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스스로를 유폐시킨' 결과였다. 이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차디찬 북구 도시에 홀로 던져진 광기의 사내를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의 푸코의 생활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매우 열성적이었으며 유능한 관료였다. 그의 강의는 인기가 있었고 문화원의 운영도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상관의 눈에 들었다.
 
=> 辛丑대운은 흉운이다. 30세 乙未年은 호년이다.
 
* 스웨덴 시절의 가장 큰 성과는 아무래도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인 『광기의 역사』를 완성한 일일 것이다. 그는 '광기'라는 구체적인 소재를 통해 당시 서구인들이 갖고 있었던 지배적인 생각을 분석하고 해부한다.
 
'스웨덴의 밤중에 시작하여 폴란드적 자유의 완고한 대낮에 끝난' 천 페이지에 달하는 이 엄청난 대작은 명저들이 흔히 그렇듯, 처음부터 가치를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는 이 책을 스웨덴에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낼 생각이었지만 정작 이를 검토 받을 교수는 '기교에 치우친 이 문학작품'이 설마 학위논문이라는 생각조차 못했다고 한다. 때문에 이 논문은 제출조차 되지 못했다. 이 책으로 학위를 받은 대학은 결국 프랑스의 소르본느 대학이었다.
 
=> 대운이 나쁘면 인정받지 못하다가도 대운이 좋으면 인정받게 된다.
 
88 78 68 58 48 38 28 18 08.3
丁 丙 乙 甲 癸 壬 辛 庚 己 --- 甲 丁 戊 丙 : 59세 乾命
未 午 巳 辰 卯 寅 丑 子 亥 --- 辰 丑 戌 寅
 
* 45세 壬寅대운 庚戌年 : 1970년. 푸코는 마침내 프랑스 지식인의 최고봉으로 여겨지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된다. 당시는 프랑스 68운동으로 상징되는 자유와 개혁의 물결이 강하게 일었던 시절이다. 그는 사르트르와 더불어 가장 진보적이며 활동적인 지식인으로 여겨졌다. 푸코는 평생 어떤 정치적 이념도 내세우지 않았지만, 정치적 반대자, 노동자, 죄수, 이민자, 동성애자(그 자신도 동성애자였다) 등 핍박받는 이들 편에 늘 서 있었다. 1970년에서 1984년 사이에 푸코가 그가 참여하거나 서명한 저항 활동은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 壬寅대운은 호운이다. 庚戌年도 호년이다.  
=> 癸卯대운 甲辰대운도 호운이다.
 
 
 
권력과 지식을 고고학적으로 파해치다 - 미셸 푸코(Michel Foucault:1926~1984) "사르트르 이후 최고의 철학자"
 
이 달에 살펴 볼 미셀 푸코(Michel Foucault:1926~1984)는 프랑스에서는 사르트르 이후의 최고의 철학자로 꼽힌다. 푸코의 인기는 국내에서도 대단해서 그의 저작은 하나도 빠짐없이 번역되어 나와 있을 정도다. 철학자들은 모든 시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이론을 꿈꾼다. 하지만 푸코는 거꾸로 한 시대나 개별적인 사건에 주목한다. 그가 생애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도서관이었다. 수많은 실증적인 자료를 발굴하고 분석함으로써 시대나 사건을 '해명'할 수 있는 이론을 정립해 나갔던 것이다. 그는 역사상 매우 독특한 철학자에 속한다.
 
 
"광기와 정상 사이의 불안한 균형"
 
미셀 푸코에 대한 어린 시절 자료를 읽고 있으면 스산한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입시에 쫓기는 우리네 학생들의 삶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의 성장 환경은 결코 불운했다고 할 수 없다.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이었을 뿐더러 아버지가 유명한 의사이고 외가 쪽도 의사집안이라 '돈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부유했었다니 말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학벌의 원조(元祖)'격인 나라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대학들이 평준화되어 일류 대학이랄 게 없지만 예전에는 소르본느 등 명문대 학벌이 매우 철저하해서 입시 경쟁이 굉장히 치열했다고 한다. 때문에 푸코의 어린 시절은 입시에 찌든 8학군 학생을 보는 듯하다. 성적 때문에 전학을 가기까지 했고 철학 시험을 위해 과외를 받기까지 했었다니 말이다.
 
그는 온종일 공부만 하고 친구들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던 '고독한' 아이였다고 한다. 성적은 골고루 우수했지만 특히 역사를 잘했다고 한다. 학교에는 '항상 책보를 싸매고 다니는' 매우 박학한 괴짜 신부가 역사 수업을 담당했다고 한다. 푸코는 그에게 매료되었고 누이들 앞에서 공부한 내용을 진지하게 설명할 정도로 역사 공부에 푹 빠져 지냈다고 한다.
 
푸코의 어린 시절은 최고의 수재들이 모이는 '고등사범학교' 진학에 맞추어져 있었다. 1945년, 그는 입시를 위해 태어나고 자란 작은 도시 푸아티에를 떠나 파리로 갔다. 최고의 합격률을 자랑하는 앙리 4세 고등학교로 전학가기 위해서다. 이 '거칠고 이상하며 극도로 내성적인 젊은 촌뜨기'는 한 해를 '재수'한 끝에 1947년 마침내 고등사범학교에 합격하는 데 성공한다.
 
고등사범학교는 사르트르, 퐁티 등 프랑스 최고 지성들이 거쳐 간 학교다. 이 곳 학생들 중에는 자부심과 젊은이 특유의 치기가 빚어낸 괴짜들이 많았다고 한다. 푸코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꼭 싸움닭 같았다. 하루 종일 고독 하게 지내다가 친구들에게 '야유'를 보낼 때만 말을 했다고 한다. 남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는 점심, 저녁 식사 시간에는 누구든 공격하고 아무하고나 논쟁을 벌였다. 심지어 강의실에서 칼로 자살을 시도할 정도였는데 이정도면 괴짜라기보다는 정신병자에 가까울 듯싶다. 실제로 그는 항상 '광기로 떨어질 수 있는 외줄 위에서 불안한 평형을 유지하는' 위태위태한 학생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사이코 같은 행동도 수재들에게는 천재다운 행동으로 정당화되는 법이다. 푸코도 그랬다. 그는 실제로 고등사범에서 가장 뛰어난 그룹에 속했고 끊임없이 읽고 또 읽으며 자료를 꼼꼼하게 정리하고 사색하는 성실한 공부로도 잘 알려진 학생이기도 했다.
 
1951년, 한 번의 실패 끝에 그는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한다. 시험을 위한 시범 강연으로 주어진 주제는 '인간의 성본능'이었다고 한다. 심리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이듬해에는 병리심리학에 대한 학위를 받았고 이를 위해 그는 병원과 감옥에서 심리검사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푸코의 학창시절을 보면 흥미롭게도 후의 그의 철학적 작업에 쓰일 주요 소재들이 모두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조금 뒤에 살펴보겠지만 광기, 성(性), 병원과 감옥은 그가 철학적 분석에 사용했던 핵심 개념들이다.
 
"광기의 역사"
 
1955년, 푸코는 스웨덴 웁살라의 프랑스 문화원 원장 자리를 얻는다. 이 곳 대학의 강사 자리를 겸임하던 자리였는데 푸코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스스로를 유폐시킨' 결과였다. 이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차디찬 북구 도시에 홀로 던져진 광기의 사내를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이 곳에서의 푸코의 생활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매우 열성적이었으며 유능한 관료였다. 그의 강의는 인기가 있었고 문화원의 운영도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상관의 눈에 들었다.
 
게다가 그의 생활은 '철학도' 하면 흔히 떠오르기 마련인 어둡고 심각한 얼굴의 금욕적인 사색가와도 거리가 있었다. 그는 멋진 재규어 차를 몰고 다녔고 술자리에도 줄곧 잘 어울렸다고 한다. 푸코가 문화원에서 했던 일은 외국인을 위한 불어 강좌였음을 보면, 이 당시 그는 우리가 흔히 마주치는 외국어 원어민 강사들이 주는 이미지와 크게 달랐을 것 같지 않다. 학교에서는 예민하고 날카로웠던 학생도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부드럽고 세련되어 지는 법, 푸코의 경우도 이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한 참 후이지만 1962년에 클레르몽 대학 교수 시절에는 그는 학생들 사이에서 '세련된 댄디'로 통했다.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은 여전했지만 밝고 적극적이었고 차림세도 말끔해서 어느덧 '성공이 어울리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철학적 작업의 소재도 매우 구체적이다.
 
스웨덴 시절의 가장 큰 성과는 아무래도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인 『광기의 역사』를 완성한 일일 것이다. 그는 '광기'라는 구체적인 소재를 통해 당시 서구인들이 갖고 있었던 지배적인 생각을 분석하고 해부한다.
 
푸코는 역사를 철저하게 분석하여 실증적인 문헌 증거를 들이대며 철학을 하는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르네상스 시기의 광기란 결코 이성과 동떨어진 개념이 아니었다. '귀신 들린 사람'의 이미지가 주듯, 뭔가 신비롭고 이성이 줄 수 없는 그 무엇을 주는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17-18세기에 들어오면 광기는 '반사회적인 범죄'로 여겨진다. 미친 사람들은 거지, 범죄자, 게으름뱅이와 같이 감금당했고 처벌받았다. 푸코는 그 이유를 노동력을 중시했던 당시의 직업관에서 찾는다.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곧 죄인으로 여겨졌고 광기도 이런 측면에서 교정되어야 할 죄악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에 들어 산업이 발달하여 일손이 달리자 더 이상 광인은 범죄자나 거지와 같은 부류로 취급될 수 없었다. 광인 외의 사람들은 일을 시키기 위해 석방되었던 것이다. 이제 수용소에는 광인들만 남았고 광기는 비로소 '치료' 받아야 할 질병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광기는 질병만은 아니다. 고야나 고호, 니체에서 보듯 광기는 이성을 뛰어넘는 혜안을 우리에게 준다. 광기를 배제한 우리의 문명은 '이성 혼자서 독백'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성적인 것이 곧 최선이고 바람직하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광기를 이성적으로 설명하고 통제하기에 앞서 우리에게는 광기 앞에서 우리의 이성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푸코는 이처럼 광기와 같은 소소한 소재들의 분석을 바탕으로 우리 사유의 구조를 드러내고 그 한계를 밝히려고 했던 것이다.
 
"모닝 빵 같은 푸코"
 
'스웨덴의 밤중에 시작하여 폴란드적 자유의 완고한 대낮에 끝난' 천 페이지에 달하는 이 엄청난 대작은 명저들이 흔히 그렇듯, 처음부터 가치를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는 이 책을 스웨덴에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낼 생각이었지만 정작 이를 검토 받을 교수는 '기교에 치우친 이 문학작품'이 설마 학위논문이라는 생각조차 못했다고 한다. 때문에 이 논문은 제출조차 되지 못했다. 이 책으로 학위를 받은 대학은 결국 프랑스의 소르본느 대학이었다.
 
푸코는 바르샤바 대사관 문화 참사관, 함부르크 프랑스 문화원장, 학위 취득 이후에는 다시 프랑스로 와서 클레르몽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를 몇 년 지내다가 다시 브라질로, 튀니스로 가는 부단한 떠돌이 생활을 계속했다. 어느 경우에든 관료로서건 학자로서든 대단한 능력을 인정받았는데, 『말과 사물』은 이 바쁜 가운데서 나왔다.
 
푸코는 '두더지 같은 시선'으로 엄청난 역사 자료들을 통해 일상을 시시콜콜하게 분석함으로써 한 시대의 지식을 형성하는 큰 틀을 드러내곤 했다. 당시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현상학 운동이 강하게 유행을 탈 때였다. 지식이란 이성적인 인간 주체에 의해 형성된다는 믿음이 확고할 때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푸코는 구조주의에 가까운 견해를 편다. 즉 지식은 개개인의 이성보다는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인식 구조를 통해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푸코의 견해를 이런 식으로 설명해 볼 수 있겠다. 길거리를 벌거벗고 다니는 사람은 정신병자로 몰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모두가 벌거벗은 공중목욕탕에서는 옷을 입고 들어오는 사람이 정신병자다. 예전 어떤 재벌 총수는 천천히 밥을 먹는 꼴을 못 본 나머지 자신 보다 더 늦게 수저를 내려놓는 이는 남은 밥을 먹기는커녕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것을 각오했어야 했다. 하지만 서구인의 만찬에서 이렇게 먹었다가는 야만인으로 몰릴 게 뻔하다. 이처럼 상식은 어떤 '장(場)'에 있느냐에 따라 상대적이다.
 
지식도 그렇다. 신앙이 지배 하는 사회에서는 전후관계를 따져 정확한 수치를 들이 대는 과학적 해석은 오히려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이다. 이 사회에서는 성경에 비추어 해석해주는 게 더 진리같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요새같이 자연과학이 지배하는 시대에 신의 뜻에 기대어 만사를 해결하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이처럼 각각의 시대에는 우리네 앎을 형성하는 거대한 인식의 틀이 있다. 이를 푸코는 '에피스테메(episteme)'라고 한다. 푸코는 고고학자들이 유적을 발굴하듯이, 수많은 구체적인 문헌 자료들을 통해서 각 시대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틀-에피스테메의 모습을 드러내고 밝히려 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그림을 분석하며 시작되는 이 두껍고 난해한 『말과 사물』은 르네상스부터 근대까지의 시대별 에피스테메를 드러내 주었다. 이 책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서 '마치 모닝 빵처럼 팔려나갔다'고 한다. 휴양지에서조차 『말과 사물』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감시와 처벌"
 
1970년, 푸코는 마침내 프랑스 지식인의 최고봉으로 여겨지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된다. 당시는 프랑스 68운동으로 상징되는 자유와 개혁의 물결이 강하게 일었던 시절이다. 그는 사르트르와 더불어 가장 진보적이며 활동적인 지식인으로 여겨졌다. 푸코는 평생 어떤 정치적 이념도 내세우지 않았지만, 정치적 반대자, 노동자, 죄수, 이민자, 동성애자(그 자신도 동성애자였다) 등 핍박 받는 늘 이들 편에 서 있었다. 1970년에서 1984년 사이에 푸코가 그가 참여하거나 서명한 저항 활동은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감시와 처벌』은 이런 가운데서 나왔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푸코는 치밀한 사료 분석을 통해 감옥의 역사를 분석하고 드러낸다. 그가 감옥의 분석을 통해 의도했던 것은 점점 더 치밀해지고 강력해지는 권력의 모습을 마치 해부하듯 생생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과거의 권력은 잔인한 공개처형(사체를 찢어죽이기 등)을 통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여 대중을 통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권력 행사는 그만한 저항을 불러올 여지가 있다. 게다가 공개 처형 같이 극악한 방법을 쓰는 국가는 역설적으로 구성원에 대한 통제가 잘 안되는 사회라고 보아도 좋다. 중국이나 북한에서는 지금도 이런 방법을 쓰고 있지만 이들 국가가 미국이나 프랑스같이 인권이 발달한 나라들보다 개인에 대해 더 잘 정보를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는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현대의 권력은 눈에 띄지 않게 섬세하게 개개인의 행동을 통제하고 규제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행사한다. 그 방법은 바로 '규율과 지도'를 통해서이다. 예컨대 우리는 학교에서 수업시간의 예절, 복장 태도 등 세세한 규율에 따라 지도를 받는다. 그리고 각각의 내용은 기록되어 관리된다. 모든 행동은 세밀하게 규정된 규칙으로 나뉘어 지며 이를 따르는 이 가운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권력에 대해 복종하도록 길들여지는 것이다. 이를 통해 권력은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필요한 만큼의 처벌을 통해 개인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권력의 통제는 점점 더 효율적이 되어갔다. 푸코는 벤담이 제안한 감옥 설계 방법인 '일망감시체제(Pan-opticon)'에 주목한다. 예전에 감옥이란 죄수들은 한 데 모여 있고 간수는 따로 떨어져 있는 형태였다. 이 경우에 죄수들은 공모하여 폭동을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높아진다. 하지만 일망 감시 체제에서는 죄수들은 방 하나 하나에 분리 수감되면서도 간수는 가운데 있는 홀(hall)에서 전체 감방을 한 눈에 감시할 수 있다. (이런 형태의 감옥은 이제는 매우 일반화되었다. '쇼생크 탈출'에 나오는 감방의 모습을 생각하면 된다.)
 
점점 더 발달하고 있는 정보통신 기술은 권력에게 일망감시체제와 같은 효과적인 감시체계를 선사해 주었다. 권력자는 한 눈에 모두를 통제하고 '규율'이라는 이름으로 구성원 행동 하나 하나까지도 규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푸코의 관심은 이제 권력의 문제로 옮겨 간다. 그리고 지식과 권력이 어떻게 연결되고 작용되는지를 밝히는 데 몰두하였다.
 
"개구리의 안개"
 
1976년부터 쓰여 지기 시작한 『성(性)의 역사』도 이런 관심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성이라는 소재를 통해 지식과 상식이 형성되고 권력이 작용되는 모습을 드러내 보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완성되지 못했다. 1984년, 푸코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쓰러졌고 병원에 옮겨졌으나 곧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인은 에이즈로 인한 합병증이었다. 하버마스, 퍼트남 등 동시대의 지성들이 아직도 살아있음을 볼 때 58세라는 그의 생애는 너무 짧은 것이었다.
푸코의 책은 관념의 세계를 공허하게 해매는 여느 철학책들과는 무척 다르다. 그는 치밀한 사료 수집과 역사 분석을 통해 한 시대나 사회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새로운 철학 방법론을 펼쳐 보였다.
 
하지만 생전의 그의 강의를 들었던 미국 학생들은 'frog fog'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프랑스(France)의 푸코(Foucault)라는 말을 발음에 빗대어 비꼰 말로, 문학적 수사와 알 듯 모를 듯한 역사 자료로 치장한 나머지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미 푸코 생전에 그가 인용한 역사적 사료가 과연 객관적이고 정확한지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유려한 문학적 표현은 수많은 오독(誤讀)과 오해를 낳았고 말이다.
 
그 뿐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에 대한 섬세한 분석에 기초한 이론이 가장 과학적이며 설명력이 클 듯하지만 실은 가장 편견에 치우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모래의 모습을 잘 분석했다고 해서 해안의 모습을 가장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푸코의 철학적 방법론이 '재미' 이상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이유를 아마도 이 점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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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복(중동고 철학교사, 서강대 철학과 박사과정)이 작성한 이 원고는 '고교독서평설(지학사)' 2003년 9월호에 실렸던 것입니다. 인용을 허락하신 안광복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이 글에 대한 권리는 지학사에 있음을 알립니다.
 
 
출처 : 명리마을- cafe.daum.net/sajusaj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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