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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 이휘소 사주
Mr.대산 2017-10-03 (화) 11:37 조회 : 1738

물리학자 이휘소
 
생몰1935년 1월 1일(서울) ~ 1977년 6월 16일 (향년 42세) | 돼지띠, 염소자리
학력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대학원외 2건
 
 
양 력: 1935년 2월 4일
음/평: 1935년 1월 1일 남자
 
시 일 월 년
@ 辛 丁 甲
@ 亥 丑 戌
 
丙 乙 甲 癸 壬 辛 庚 己 戊 대운: 순행
戌 酉 申 未 午 巳 辰 卯 寅
81 71 61 51 41 31 21 11 1.4
 
대운 시작: 1세 4월 21일
 
사망일시: 1977년(43세, 丁巳년) 6월(병오월) 16일(갑진일) 13시 22분 교통사고로 사망함.
 
 
 
이휘소(李輝昭, 영어: Benjamin Whisoh Lee 벤저민 휘소 리[*], 1935년 1월 1일 ~ 1977년 6월 16일)는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 이론물리학자이다. 세계적으로는 그의 영문명 벤저민 W. 리(Benjamin W. Lee), 벤 리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20세기 후반 입자물리학에서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진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문제의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맵시 쿼크의 질량을 예측하여 그 탐색에 공헌하였다.
 
물리학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래 약 20년간 모두 107편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이 중 77편의 논문이 학술지에 출판되었다. 10회 이상 인용된 논문은 이 중 68편에 달하며, 500회 이상 인용된 논문은 모두 7편이다.
 
2011년 6월 현재 그의 모든 논문들은 12,500회 이상 인용되고 있다.[1] 대표적인 제자로 강주상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가 있다.
 
[편집] 생애
[편집] 유년기
 
이휘소는 일제 강점기였던 1935년 1월 1일, 경성부 모토마치(元町)에서 아버지 이봉춘, 어머니 박순희의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모친 박순희는 모토마치의 《慈恵病院(지케이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부친 이봉춘 또한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려운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치료하는 것을 싫어하여 개업의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집안 생계는 모친이 도맡아 꾸려나갔다. 부친이 잠시 소학교 선생을 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모친과는 이때 사제지간으로 처음 연을 맺었다고 알려지고 있다.[2]
 
일곱 살이던 1941년에 경성사범학교 부속제1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경성사범학교에 부속된 국민학교는 모두 세 곳으로, 원칙적으로 일본인만이 입학할 수 있지만 조선인의 입학도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은 부속제1국민학교, 그리고 보통 조선인들이 입학하는 부속제2국민학교, 그리고 주로 교생들이 가르치는, 시골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단급 국민학교가 그러하였다.
 
이휘소는 부속제1국민학교에 시험을 치르고 입학하였는데, 그가 재학할 당시 이곳에는 조선인이 두어 명 있었다. 이 무렵, 이휘소 일가는 모토마치에서 신세쓰마치(新說町)로 이사해 있었다.
 
이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 및 성북구 보문동에 해당하는데, 이휘소 일가가 이사한 곳은 신세쓰마치 중에서 특히 지금의 성북구 보문동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모친은 이곳에서 소아과와 산부인과를 전문으로 하는 '慈愛医院'(지아이의원, 광복 후부터는 자애의원)을 개업하였다.
 
이휘소에게는 당시 민희식이라는 부유한 집안을 가진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집에는 해방 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책이 많았고, 이휘소는 그의 집에서 일본어 서적을 자주 빌려 읽곤 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던 책은 월간지 《어린이 과학》(子供の科学, 코도모노 카가쿠)[3]이었다고 전한다.
 
국민학교 4학년 재학 중에 광복을 맞이하였고, 광복과 함께 경성사범학교가 폐지되어, 1947년에 졸업할 무렵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 소속이었다. 그 해에 경기중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는 중학교 시절 화학반에서 주로 활동하였다.[2]
 
[편집] 청소년기
 
이휘소가 중학교 4학년(현재의 고등학교 1학년에 해당) 때인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휘소 일가는 잠시 서울 근교 광릉의 친척 집으로 옮겨 지내다가, 9.28 서울 수복 이후 다시 집에 돌아갔지만, 1.4 후퇴 때 다시금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부친의 옛 고향집으로 피난을 갔다.
 
모친은 이곳에서도 병원을 개업하여 활동하였으며, 이휘소는 그런 어머니를 도와 이웃 도시 대전까지 나가서 병원 운영에 필요한 약품을 사오곤 했다.
 
이후 부친의 어느 소학교 제자의 권유로 경상남도 마산시로 옮겼다. 이때 부친은 창원보건소장으로서 공직생활을 시작하였다.
 
마산에서 창원까지는 출퇴근을 할 만한 거리가 아닌 탓에 그는 창원보건소에서 주로 지내다가 주말 무렵에야 마산의 집에 돌아가곤 했는데, 직장 생활이 1년 남짓 되던 1951년 12월의 어느 날 밤에 귀가하던 중 개울 둑에서 발을 헛디뎌 사망하였다.[2]
 
한편, 이휘소는 서울에서 공주, 마산으로 피난생활을 이어가면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었지만, 학교 교육에 대한 전시 훈령이 발효되어, 이휘소는 위탁생 신분으로 인근 마산중학교에 임시 편입할 수 있었다. 얼마 후 경기중학교가 부산으로 옮겨와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5학년 과정을 마쳤다.[2]
 
[편집] 대학 입학
 
그 후 이휘소는 검정고시를 치뤄 대학 입학 자격을 얻고, 입학 시험을 통해 1952년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서울대학교는 부산시 대신동의 가건물로 옮겨 와 있었고, 서울대학교만 따로 있지 않고 〈전시 연합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모든 대학교가 한 곳에 모인 상황에서 수업만 학교별로 따로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서울 수복 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4] 자리에 임시 교사를 세웠다가 이내 미군 철수 이후에 태릉으로 옮겨갔다. 이휘소는 한 방에 10명씩 수용하는 임시 기숙사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하였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서 한 학기 수업을 받은 후, 이휘소는 물리학에 큰 흥미를 느꼈고, 이후 수차례에 걸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로의 전과를 시도하였다.[2]
 
[편집] 미국 유학기
 
하지만 서울대학교는 그가 당시 재학중이던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서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로의 전과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학교 수업과는 별도로 독학으로 물리학을 공부하고는 있었지만, 수차례에 걸친 시도가 모두 실패로 끝나 큰 실망을 하고 있던 중에, 마침 한국전 참전 미군 장교 부인회의 후원을 받는 유학장학생에 선발되었다.
 
이에 그는 좋아하는 물리학을 실컷 공부하지 못하게 하는 서울대학교를 과감하게 박차고 나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하였다. 그가 편입할 대학교는 오하이오 주 옥스퍼드 시의 마이애미 대학교로 결정되었다. 1955년 1월 26일 아침에, 이휘소는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하였다.
 
당시에는 제트기가 보급되지 않았기에 그가 탄 것은 프로펠러 비행기였고, 그는 도쿄,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시카고를 경유하여 1월 31일에야 겨우 목적지 마이애미 대학교에 다다를 수 있었다.[2]
 
이휘소는 1955년 1월에 오하이오 주 마이애미 대학교 물리학과에 편입하였다. 편입 전까지의 서울대학교에서의 성적을 고려하여, 모두 70단위가 인정되었는데, 70단위는 당시 미국 대학교 학제로서 약 2년 반 정도에 해당하므로, 그는 3학년 과정에 바로 진학할 수 있는 셈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7시 이전에 일어나 7시 10분에 아침 식사를 하고 8시부터 학교 수업을 듣기 시작하여,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에서 과제를 모두 끝내고 자정이 넘어 기숙사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하였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온지 1년 반만인 1956년 6월에 물리학과를 숨마쿰라우데(summa cum laude, 미국 대학의 최우등)로 졸업하였고, 학과장 등의 추천으로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였다.[2]
 
그가 대학원에 진학하기까지 여름방학 기간은 아주 자유로웠는데, 그는 인디애나 주의 퍼듀 대학교 대학원의 여름 학교(Summer school[5]) 과정에 등록하여 공부하였다. 또한 이 기간에 자동차 운전도 배웠다.[2]
 
이휘소는 여름방학이 끝난 1956년 8월부터,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교육조교(TA) 장학생이어서, 공학과와 의예과 학생들의 물리학 실험 TA를 담당하였다. 이듬해 가을학기부터는 연구조교(Research assistant)와 TA를 겸하게 되었고, 실험 지도만 하던 것에서 정식으로 강의 하나를 배정받게 되었다.
 
그가 가을학기에 수강하던 몇 개의 강의 중, 원자핵 이론 강의를 담당했던 시드니 메슈코프(Sydney Meshkov)는 이후 이휘소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무렵 이휘소는 물리학에서 본격적으로 소립자 이론물리학, 정확히는 장의 양자론의 전공을 희망하게 되었다.[2]
 
이휘소는 피츠버그 대학교의 박사 학위 자격시험에서, 차점 합격자와 총점이 20점 이상 벌어지는 높은 점수로 수석 합격하였다. 이후 몸이 쇠약해져 기관지염으로 고생하였다.
 
그는 몸을 추스른 후, 바로 석사 학위 논문에 매진하여, 한 달 가량 후에 완성하였다. 학위 논문 제목은 〈산란행렬의 해석적 특성과 그 응용(On the Analytic Properties of the -Matrix with Some Application)〉이었다.
 
그는 이렇게 1958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석사 학위 논문을 좀더 다듬어서, 그 해 12월에 《피지컬 리뷰》에 기고하기도 하였다.[6] 그는 이미 피츠버그 대학교의 박사 진급을 앞두고 있었지만, 메슈코프는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며 그를 명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에이브러햄 클라인(Abraham Klein)에게 추천하였다.
 
클라인은 이휘소의 재능을 인정하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박사 학위 자격시험인 예비시험을 면제받도록 해주었으며, TA 및 RA 장학금보다도 더 혜택이 좋은 해리슨 연구장학금(Harrison Fellowship)을 주선해주기까지 했다.[2]
 
클라인은 당시 서른 세살의 젊은 교수였는데, 이휘소는 클라인과 함께 공동 연구를 수행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에 조금씩 접근해 나갔다. 그러다 1960년 11월에 〈 중간자와 핵자 산란 현상의 이중 분산 관계(Study of Scattering in the Double Dispersion Representation〉으로 물리학 박사(Doctor of Philosophy) 학위를 받았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그가 박사 학위증을 공식적으로 받은 것은 1961년 2월 4일이었다. 박사 논문 디펜스가 끝난 11월부터 1961년 8월까지, 이휘소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박사후 연구원 및 전임 강사로 임용되었다.[2]
 
이후 이휘소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회원으로 초빙되었는데, 그 임기는 1년이었다. 그 이후부터의 직장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그는 파격적으로 1961년도부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조교수로 임용되었는데, 이는 클라인의 배려였다.
 
이렇게 그는 조교수로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회원으로 방문 연구를 하는 형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임기가 끝난 이후의 걱정이 필요없게 되었다. 당시 젊은 연구자로서 이휘소가 가진 위상을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이휘소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로 떠나기 전, 미국 각지 대학의 교원으로 임용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될 또래 동료들과 함께 기념 삼아 공동 논문을 집필하였고, 이를 《리뷰 오브 모던 피직스》에 기고하였다.[7][2]
 
[편집]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및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1961년 가을, 이휘소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자연과학부의 연구회원이 되었다. 그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아인슈타인 가 31번지에 위치한 미혼자용 기숙 아파트에 거처를 정했다. 이휘소는 저녁 식사나 술자리 같은 사적 모임에 거의 참석하지 않고 밤낮없이 연구실에만 붙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무렵, 이휘소는 양-밀스 이론의 양자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가환 게이지 이론인 양-밀스 이론까지도 아닌, 양자전기역학과 같은 가환 게이지 이론의 양자화 문제만 하더라도 정준 양자화로도, 경로적분 양자화로도 상당한 테크닉을 요하는 고난도 작업이다.[2]
 
이듬해 2월에 뉴욕 맨해튼의 컬럼비아 대학교의 주임교수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가 이휘소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컬럼비아 대학교의 조교수로 채용하고 싶다고 제안해왔다. 그러나 이휘소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오기 전부터 이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되어 있었기에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이휘소는 자신을 조교수로 만들어주었던 클라인에게 연락하여 이 문제에 관해 상의하였는데, 클라인은 이휘소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임기를 경력으로 인정하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복귀하는 대로 부교수로 승진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였고, 이에 이휘소는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게 되었다.[2]
 
이휘소는 필라델피아를 떠나 프린스턴으로 올 무렵 말레이시아 화교 마리안 문 칭 심과 교제를 시작하였고,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근무할 때 한달에 한두 번 정도의 주말에 필라델피아로 돌아가서 마리안과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다 1962년 3월에 둘은 약혼하였고, 미국 이민국에서 이휘소의 영주권이 나오는 대로 결혼하기로 했다. 마리안은 당시 머크사 연구소의 세균학자로 근무하면서 여자 의과대학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교환 비자(J-1 비자)로 미국에 왔기 때문에 체류 기간이 2년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휘소가 미국 영주권을 취득하게 되면, 이휘소의 배우자로서 마리안 또한 자동으로 거주 허가가 나도록 되어 있었다. 이후 마리안은 의과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이휘소의 내조에 전념하기 위해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기만 하고 따로 개업의 활동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 해 5월 7일에 이휘소는 워싱턴에서 마리안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제프리 파운틴 리와 딸 아이린 앤 리를 두었다.[2]
 
1962년 6월 초, 그는 국제 원자력 기구가 주최하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이론물리학 세미나(Seminar on Theoretical Physics)에 참석할 10인의 미국 대표단으로 선출되었다.
 
이 때는 아직 국적상으로 미국인이 아니었음에도 미국 대표단에 선발된 것이다. 트리에스테 이론물리학 세미나는 1962년 7월 16일부터 8월 25일까지 개최되었다.
 
이 무렵의 이휘소는 젊은 연구자로서 미국 내에서 무시못할 명성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단계에서는 아직은 어떤 큰 성과를 내지는 않았다.
 
그의 중요한 학문적 성과는 모두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60년에 중반에 이미 노벨상을 주어야 했다'거나 '내 밑에 아인슈타인도 있었지만 이휘소가 더 뛰어났다'는 등의 몇몇 소설들에서의 묘사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으로 사실과 다르다.[2]
 
1963년에 이휘소는 앨프레드 P. 슬론 재단의 연구회원직을 수행하였다.[8] 또한 이 해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복귀하였고, 클라인의 약속대로 바로 부교수로 승진하였다.
 
당시 그에게는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중요한 물리학회를 비롯해 여러 대학과 연구소에서 강연 초청이 줄을 이었기 때문에 출장이 잦았다.
 
1965년에 그는 다시 정교수로 승진하였는데, 이는 비교적 빠른 편에 속했다. 1964년에 다시 1년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 회원을 지낸 것을 또 다른 경력으로 인정받은 결과였다.[2]
 
[편집]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 재직 시기
 
양전닝1965년 가을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양전닝이 이휘소를 찾아왔다. 그는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석좌교수(Albert Einstein Professorship of Physics)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휘소에게도 함께 가자고 권유하기 위해서였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측에서는 그의 잔류를 희망하였으나, 클라인 교수는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하라는 편안한 대답을 해주었다고 전해진다. 이휘소는 1966년 5월 16일에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 방문 교수로 초청되어 8월 31일까지 재직하였으며, 가을학기가 시작되고 9월 25일부터 양전닝 이론물리학 연구소의 정교수로 부임하였다.
 
이휘소는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으로 전직하면서 처음으로 단독주택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자택은 연구실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으며,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은 맨해튼 옆의 롱아일랜드 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자동차로 15분 정도만 달리면 대서양에 이를 수 있었다. 또한 한 시간 정도 달리면 맨해튼에도 접근할 수 있었다.[2]
 
당시에는 논문 원고를 제출하여 심사가 끝나 학술지에 게재될 때 까지는 최소 반 년 정도가 걸렸으며, 《피지컬 리뷰 레터》만 해도 최소 한 달 이상은 각오해야 했다.
 
하지만 입자물리학은 연구 템포가 그 어떤 학문보다도 빠른 편이라 논문 한 편을 학술지에 발표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논문이 나오기 전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기에, 누군가 반론을 제기하거나, 이 반론을 인용한 논문을 이미 썼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또한 잘못된 논문으로 판명될 가능성도 있었다.
 
이 때문에 학술지에 실리기까지 마냥 기다리기만 하지 않고, 관심을 가진 학자들에게 연구 내용을 미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인터넷이 보편화된 요즘에야 arXiv라는 웹사이트가 존재하여, 전 세계의 인터넷이 사용 가능한 어떤 물리학자들도 거의 모든 프리프린트들을 쉽게 찾아서 몇 초 만에 바로 내려받아 읽어볼 수 있게 되었지만, 인터넷이 보급되기 수십년 전이었던 당시에는 arXiv와 같은 혜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당시에는 모든 물리학자들이 스탠퍼드 선형 가속기 센터에서 운영하는 스탠퍼드 물리학 정보 검색 시스템(Stanford Physics Information Retrieval‍ System)에 사본을 보내 등록하고, 그곳에서 발간하는 프리프린트 리스트를 정기적으로 구독하였다.
 
그러다가 리스트에서 관심이 가는 논문을 발견하면, 저자에게 엽서를 띄워 사본을 요청하고, 그러면 그 저자의 호의로 사본을 겨우 받아볼 수 있는 형태로, 논문을 받아보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당시 이휘소는 엄청난 분량의 프리프린트 모음집을 가지고 다녔는데, 이를 바탕으로 세계 각국의 석학들을 찾아다니며 교류하고 공동 연구를 수행하며 많은 지식을 쌓았다고 전해진다.[2]
 
1967년 11월에, 스티븐 와인버그는 《피지컬 리뷰 레터》 에 짧은 논문[9]을 발표했고, 이휘소는 논문 게재 심사를 의뢰받아 이를 읽게 되었다.
 
와인버그는 이 논문에서 약한 상호 작용에 관한 설명을 시도하였다. 약한 상호 작용은 자연계의 네 가지 상호 작용 중 하나인데, 이러한 네 가지 상호 작용들을 중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빛알, 글루온 등의 게이지 보존들이다.
 
이들은 모두 게이지 대칭성을 가지고 있는데, 대칭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일단 게이지 보존의 질량이 0이어야 한다. 그러나 약한 상호 작용을 중개하는 위크 보존만큼은 측정 결과 꽤 무거운 질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며, 이는 그때까지의 통념으로는 선뜻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당시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람의 손으로 일부러 게이지 입자에 질량을 끼워넣으려는 다소 거친 논문들이 범람했는데, 스티븐 와인버그만큼은 이 게이지 대칭성이 자발적으로 깨졌다고 하여 거기서부터 게이지 입자의 질량을 자연스럽게 얻으려는 독창적인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비록 그 논문에서 모든 계산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 방법이 맞을 거라는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었다. 방법이야 어찌되었든, 이것이 장의 양자론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또한 재규격화가 가능함도 보여야 한다. 하지만 위크 보존이 큰 질량을 가졌다는 것이 밝혀지고서 게이지 대칭성이 깨져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재규격화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2]
 
이휘소는 1968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이 시민권 취득 심사 때 그의 박사후 연구원이었던 윌리엄 A. 바딘(William A. Bardeen)이 이휘소의 인성(人性)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 시민이 된 직후, 이듬해인 1969년까지 구겐하임 펠로십(1968년에 수여된 구겐하임 펠로십의 목록, No.128)으로 일했는데, 이 기간에 그는 그는 프랑스에서 가족과 함께 휴가(en:Leave of absence)를 보내면서 파리 제 11대학교(Paris-Sud 11 University)에서 세미나를 갖기도 하고, 프랑스 고등연구원에서 자유롭게 연구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깨지는 현상과 그에 의한 남부-골드스톤 보존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머리 겔만과 모리스 레비(Maurice Lévy)가 정립한 선형 시그마 모형(Sigma model)의 재규격화에 관해 논문을 집필하였다.[10][11][2]
 
1970년 6월, 이휘소는 코르시카의 카쥬스(Cargèse) 여름학교에 강연자로 초청되었다. 이곳에서 이휘소는 시그마 모형의 자발적으로 부서진 대칭성과 그 재규격화에 관해 강의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젊은 대학원생 헤라르뒤스 엇호프트는 지도교수였던 마르티뉘스 펠트만과 함께 양-밀스 이론의 재규격화에 관해 연구하고 있었고, 그도 여기서 이휘소의 강의를 들었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훗날 회고하였다.[12]
 
카쥬스 여름학교에서 돌아오고 얼마 안 있어서는, 소비에트 연방 키예프에서 열린 제15회 고에너지 물리학 국제회의에 참가하며 처음으로 공산권 국가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이 회의는 8월 26일부터 9월 4일까지 개최되었다.[13][2]
 
1971년 전반기에 이휘소는, 머리 겔만의 초청으로 로스앤젤레스 근처 패서디나에 있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의 교환 교수로 5개월간 재직하였다. 이 해 여름에 이휘소는, 당시 한국과학원의 정근모 부원장과 함께 한국에서 물리학 하계대학원(Summer school)을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제도는 이미 유럽과 미국, 일본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고, 이휘소의 구상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그러나 이휘소는 한국에서 독재체제가 강화되는 것에 큰 우려를 표하면서, 모두 없었던 일로 하는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 위수령 발동, 학생운동 탄압 등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로 우리가 추진중인 하계대학원 사업을 재고하게 됩니다 ...(중략)... 하계대학원의 책임을 맡게 된다면 내가 한국의 현정권과 그 억압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쳐질까 걱정이 됩니다. 참으로 난처한 입장입니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과학 발전을 위하여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이러한 처사들에 실망되어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정부에서 이에 관한 초청이 오더라도 수락하지 않을 결심입니다. 엉뚱한 짓이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한국 국민의 장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 1972년 초, 정근모에게 보낸 서신
 
 
한편, 헤라르뒤스 엇호프트는 카쥬스 여름학교의 이휘소에게서 얻은 아이디어를 이용하여 마르티뉘스 펠트만과 함께 양-밀스 이론의 재규격화에 성공하였고, 이를 1972년 여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입자물리학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하였다.
 
하지만 당시 이들의 스킴은 일반적인 경우에 모두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고, 또 당시 물리학자들이 쉽게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는데, 이휘소가 팔을 걷고 나서 이를 알기 쉽게 풀어쓰고, 경로적분 형식 등의 다른 스킴으로까지 확장하여 서술하기도 하여, 그제서야 많은 물리학자들에게 이를 이해시킬 수 있었다.[14][15][16][17]
 
엇호프트와 펠트만은 이러한 공적이 인정되어, 1999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2]
 
1972년 10월에 박정희가 자신의 독재를 위한 유신 헌법을 선포하자 이휘소는 외국인 동료를 대하기가 부끄럽다고 가까운 한국인 친구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 강경식 전 브라운대학교 교수는 당시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 부회장이었고, 가끔 모국 방문 학술회의나 하계 심포지엄의 연사 초청의 수락을 이휘소에게 권유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이휘소는 박정희가 독재를 계속하고 있는 한은 말도 꺼내지 말라고 단호히 거절하곤 했다.[2]
 
이휘소의 대표적인 제자로 강주상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가 있는데, 그는 이 무렵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 이휘소에게 박사 학위 논문 지도를 받고 있었고, 이휘소가 객원교수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 있을 때에도 한 학기 동안 그를 따라가서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 시민이 되었지만 한국에 대한 관심은 한시도 버리지 않았고, 강주상과 함께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자주 이야기하였다. 어느 날에는 핵무기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고,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피력하였다고 강주상은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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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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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한국 역학계의 태두(泰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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